15page


15page

끝에 1943년 9월 23일 목단강 형무소에서 49세를 일기로 옥중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는 중국간도성 동불사촌에서 1991년 광복회장으로 배위는 상산이씨로 해산 강선생과 함께 환국하여 서울현충원에 양위 안치하셨다가 11월 11일 대전현충원에 안장식을 하였다. 유족으로 장자 윤모님과 차자 기모님은 30대에 가족들과 동불사촌을 수시내왕을 했으나 중국 내전 이후 우금 생사를 알 길이 없다. 해산 영애 자매는 최근까지 고국을 방문하고 동북삼성에 산재한 일가 제씨들 생사존망을 전해왔다. 삼자 성모님은 군산상고 교사로 봉직 중 신묘년에 병몰하는 불운을 맞았고 해산의 자부 김정희님이 가권을 이끌고 가업을 계승하면서 평생 교육자로 퇴임하여 동백장을 수장하였다. 장손 현태님은 해산 문호를 지키며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업에 종사 2000년 11월 인천공항고속도로 영종대교 건설에 참여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장, 2009년 10월 인천대교건설공사에 참여하여 국토해양업무발전에 이바여한 공으로 국토해양부장관표창장, 2017년 3월 토목기술 향상을 통하여 국가산업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커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는 등 기술사로서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 사자 경모님은 성일로 개명하고 16세 소년으로 단신 귀국하여 갖은 간난를 겪으며 이국에 묻히신 양친 유해를 국립묘지 이장의 명분을 갖고 노심초사 중 관계단체의 노력과 유관당국의 배려로 1991년 환국 서울현충원에 안치 1991년 11월 11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양친 안장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