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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다 . 당시는 교장이 대개 명예교장이며 , 사실상 실무자는 교감이었다 . 특히 그는 여성교육 을 위해 집터와 토지 과수원을 현 매향정보중고등학교 부지로써 희사하였다 . 1909 년 임면수는 삼일학교 교장으로서 관내 사립학교설립운동을 주도하거나 후원하는 등 교육가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 대한매일신보 1909 년 1 월 9 일자 < 학계헌신 > 이란 제목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 수원부 내 삼일학교 교장 임면수씨는 本以名望才藝로 多士心腹하는 바 이어니와 수 년전부터 교육계에 전심전력하여 학교가 處處設立하고 일일확장한다 하니 유지인사의 대모범이 되리라고 물불칭송 한다고 한다. 아울러 기호흥학회월보 제 7 호 ( 1909 년 02 월 25 일발행 ), < 학계휘문 ( 學界彙問 )> 에서도 임면수의 활동을 다음과 같이 높이 평가하고 있다 . △ 學界獻身 水原府內 三一學校校長 林勉洙氏 素以德望才藝로 多士가 心服 바 어니와 數年前부터 敎育界에 專心積力야 學校를 處處設立고 日日擴張다더라.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 4 ) 만주로의 망명과 독립운동 ( 1 ) 만주 환인현 횡도천으로의 망명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하던 1907 년 , 서울에서 안창 호 · 양기탁 · 이회영 등을 중심으로 신민회라는 비밀 결사단체가 조직되었다 . 이 단체 에서는 1909 년 봄에 일제에 의하여 한국의 멸망이 거의 확실시되자 국내에서의 민족 운 동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 그러므로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이동녕 · 주진수 · 안태국 · 김구 등이 참석한 가운데 비밀 간부 회의를 개최하고 해외에 독립 기지를 건 설할 것과 군관 학교를 설치할 것에 대하여 의논하게 되었다 . 그 결과 서간도 지역의 한 지점을 택하여 그 지역에 동지들을 이주시키고 무관학교를 설립해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로 결의하였다 . 임면수는 1910 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이 소식을 듣고 아연 질색하여 애통한 나머지 서울로 올라와 비밀히 신민회에 가입하고 양기탁씨 집에서 열리는 구국운동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