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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이 따라다니며 식견을 넓히고 인격 향상에도 노력하였다. 특히 강화에서 사학을 30여처 나 설립하고 독립교육에 매진하고 있는 이동휘씨의 감화를 많이 받았다. 그리하여 선생 은 국가민족의 항로를 계몽하고 선도하는 지침이 오직 교육부터 라는 것을 절감하고 행 리로 돌아와 신교육을 개척하고자 하였다. 임면수가 감리교 계통의 기독교인이었던 점 , 신민회의 일환으로 추진된 만주 독립운동 기지 건설 계획에 따라 이주한 점 , 만주에서 상동청년학원 관계자들과 함께 활동한 점등 을 통해 볼 때 임면수가 상동청년학원에서 공부하였을 가능성은 큰 것으로 보인다 , 1905 년 화성학교를 졸업한 임면수는 국권회복에 관심을 갖고 서울로 상경하여 상동청 년학원에 다닌 것 같다 . 이것은 임면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 특히 감리교 기독교 신자였던 그에게 있어서 상동청년학원은 큰 자 극제가 되었던 것이다 . 또한 기독교인이며 민족주의자였던 이동휘는 그의 민족의식형성 과 활동에 큰 감동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 3 ) 구한말 수원에서의 계몽운동 ( 1 ) 수원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주도 1907 년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상동청년학원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한 임 면수는 이하영 , 김태제 등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 임면수 , 이하 영 , 김태제 3 인이 국한문 취지서를 자비로 발간하여 부민들의 동참을 호소하였음을 밝히 고 있다 . 아울러 대한매일신보 1907 년 3 월 26 일 3 면 잡보 < 三氏奮義 > 에 , 수원부 사는 金濟九, 이하영, 임면수 3씨는 기독교인으로, 애국성이 분발하여 금번 국 채보상에 열심히 주선하여 특설 一會하고 취지서 數百度를 발간하여 경기 각 군에 광포 하였는데, 불과 2,3일에 의연금이 500여원에 달하였더라. 라고 하여 , 취지서 수백 장을 발간하여 수원뿐만 아니라 경기 각 군에 배포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 임면수 등이 배포한 국채보상 취지서는 대한매일신보 1907 년 3 월 29 일자 1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