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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우에는 징집유예의 특전을 부여하였다 . 그러다가 1922 년 3 월 31 일 조선총독부 수원고등 농림학교가 되었다 . 이 학교의 입학자격은 5 년제 고등보통학교 또는 중학교 졸업자였으 므로 우수한 인재들이 입학하는 학교가 되었다 . 아울러 이때부터 종래의 농학 단과제를 개정하여 농학과와 임학과로 분리되었으며 , 관비제가 자비제로 바뀌었다 . 1922 년 3 월에 는 수원고등농림학교로 개칭되었다 . 그리고 1937 년 4 월에 수의축산학과가 증설되었고 , 1943 년 농업토목학과가 증설되었다 . 1944 년 4 월 수원농림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 . 1918 년 수원농림전문학교가 한국인 · 일본인 공학 ( 共學 ) 을 하면서 학생들은 일본인 학 생이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한국인은 3 분의 1 정도에 불과하였다 . 이에 따라 민족적 대립 이 불가피하였다 . 수원고농에서는 1923 년 5 월 한국인 학생 59 명이 ‘조선인 본위 교육실시 와 민족차별에 대항하여’ 동맹휴학을 일으켰다 . 1927 년 6 월 수원고 농생들은 건아단 ( 健兒 團 ) 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으며 , 1928 년 6 월 조선개척사 ( 朝鮮開拓社 ) 라는 비밀조직 을 결성하였다 . 1930 년대 들어서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고 사회주의 사상이 교 내에 파급되면서 , 수원고농 졸업생과 재학생들은 독서회와의 통해 격문살포 · 동맹휴학 및 동맹파업을 선도하는 등 항일비밀결사운동을 전개하였다 . 1945 년 8 월 15 일 광복이 되고 한반도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9 월 11 일부터 미군정이 실 시되었다 . 미군정청에서는 수원농림전문학교의 일본인 교장 유가와 마다오 ( 湯川又夫 ) 에 서 한국인 교수인 조백현 ( 趙伯顯 ) 이 교장이 되었다 . 1945 년 11 월에 대구농림전문학교를 병합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분리하였고 , 본교에는 농화학과가 증설되었다 . 미군정하에 1946 년 3 월 29 일 문교부가 설치되면서 고등교육기관에 대한 정비 작업에 들어갔다 . 일제시대에 고등교육기관은 식민지 고등관리의 양성과 식민지 경영에 참여할 고등 지식인 양성을 목적으로 한 경성제국대학과 각 방면의 전문학교들이 있었다 . 서울에 는 경성의학전문학교 , 경성치과전문학교 , 경성법학전문학교 , 경성광산전문학교 , 경성고 등공업학교 , 경성고등상업학교 , 경성사범학교 본과 등의 고등교육기관이 있었다 . 그리고 지방에도 의학전문학교를 비롯한 전문학교가 있었으며 , 수원에는 수원농림전문학교가 있 었다 . 그러나 광복 후 이들 학교의 교수진들은 모두 한국인으로 채워져야만 했는데 , 유능한 교수를 충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 고등교육의 질을 저하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고 급인력의 신속한 양성이 요구되었고 효율적인 고등교육기관으로의 개편이 필요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