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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한편 , 일제는 개량품종의 육성과 배포를 목적으로 1908 년 종묘장을 설치하여 , 일본식 농업기술체계를 지방에까지 이식 · 전달하였다 . 그러나 1920 년대 후반부터 일본식 농법 체계가 전혀 한국의 조건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문제제기가 일어났다 . 이에 중앙의 권업모 범장이 농사시험장으로 개편과 더불어 지방의 농업기술을 지배해 왔던 도종묘장도 개편 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 1932 년 8 월 22 일 농림국장 ( 農林局長 ) 통첩 ( 通牒 ) 제 133 호로 도종 묘장을 도농사시험장 ( 道農事試驗場 ) 으로 개편하였다 . 도농사시험장으로 개편되면서 실 질적으로 기존의 도종묘장에서 계속해 온 사업을 계승함과 동시에 농업에 대한 시험 · 조 사사업이 확충되었다 . 즉 지방에 맞는 품종의 선택에 관한 시험이 본격화될 수 있었다 . 일제는 권업모범장을 농사시험장으로 , 도조묘장을 도농사시험장으로 개편하여 존속하 다가 , 1944 년 5 월 이를 모두 농업시험장 ( 農業試驗場 ) 으로 개편하였다 . 15 년 동안 농사시 험장은 여러 차례 「관제」와 「사무분장규정」이 개정되었으며 , 그에 따라 조직과 사업내용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 일제 말기인 1944 년 5 월 농사시험장 내부에서 논의되었던 「농업기술기관정리통합안 ( 農業技術機關整理統合案 ) 」에 의거하여 , 농업기술기구에 대한 대대적인 정리 · 통합이 단 행되었다 . 우선 ‘농사시험장’을 ‘농업시험장’으로 고치고 , 농사시험 연구기구를 전부 총독 부 산하로 일원화하였다 . 즉 중앙에는 본부를 두고 본부 내에는 시험부 · 총무부 · 경영부 를 설치하고 , 지방에는 지장과 분장을 설치하였다 . 이와 함께 연구대상도 단순히 재배기 술의 개량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농촌에 농업기술을 직접 전달할 수 있는 조직으로 개 편되었다 . 그리고 각도의 농사시험장이 중앙의 농업시험장 산하로 들어오면서 각도 주요 농산물 생산지를 지장으로 정하고 , 그 외 중요지를 분장으로 정하였던 것이다 . 이에 따라 경성 · 사리원에 4 분장 , 이리 · 정주 · 함흥지장에 2 분장 , 광주 · 대구지장에 각각 분장을 두게 되었다 . 그리고 「사무분장규정」이 개정되면서 , 총무부 · 경영부 · 시험부 및 여자잠 업강습소를 두게 되었다 . 일제는 ‘권업모범장’이라는 미명하에 농업기술 보급기관을 설치하여 한국에 일본식 농 업기술을 강제하였다 . ‘권업모범장’은 이름 그대로 일본식 농업기술을 ‘모범’이라고 하여 강제적으로 보급하는데 있었다 . 일제는 한국의 전통적 농업과 자연환경을 무시한 채 일본 식 농업체계를 강제적으로 보급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 일제의 권업모범장은 한국의 전 통적 농업기술체계가 저급하고 생산력이 매우 낮은 것으로 보고 품종과 비료의 개량을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