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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강 _ 수원의 농업과 권업모범장 | 75 사항은 종예계에서 담당해 왔지만 이제는 별도로 부서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 이에 따라 기사 9 명을 10 명으로 증원하였으며 , 그리고 농림업 교습을 담당해 왔던 농림학교를 권업 모범장 소관에서 이탈시켰다 . 이에 농림학교는 농림전문학교 ( 農林專門學校 ) 로 승격되었 으며 , 그해 3 월 「조선총독부 수원농림전문학교 관제」가 발포되어 1918 년 4 월 15 일에 개교 하였다 . 권업모범장의 역할이 연구 · 시험 기관으로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일제의 농업정책 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1910 년대까지 권업모범장의 주된 사업은 지도 · 장 려를 통해 ‘모범’을 보이는 수준이었고 , 방법상으로는 한국의 전통적 농업기술과 품종을 구축 ( 驅蹴 ) 하고 일본식 농업기술체계와 일본품종을 강제적으로 이식하는 정도에 불과하 였다 . 그런데 1920 년부터 일제가 실시한 대규모 농업정책이 산미증식계획이었다 . 대규모 쌀 증산책이 실시되는데도 불구하고 농업기술을 총괄하는 기구인 권업모범장은 조사시험 등 응급적 사항 대해서는 시험 · 연구가 가능하였으나 , 토양 , 비료 또는 병리 , 곤충 등 농 업 전반에 걸친 과학적 연구와 농산제조물 등의 시험연구에 대해서는 여력이 없었다 . 권업모범장은 대규모 쌀 증산정책의 실시와 더불어 그 위상이 도리어 위축되면서 , 일 제는 1926 년 4 월부터 제 2 차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게 되었다 . 일제는 1920 년대 후반에 들어 일본식 농업기술체계의 단순한 이식만으로는 한국에서 농업생산력 증대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 1920 년대 중반에 들어 일본식 농업기술은 한국의 기후와 토질에 적응하지 못해 오히려 농업생산력이 정체되는 현상을 보이게 되었다 . 그러면서 권 업모범장은 1928 년부터 실질적인 시험연구기관으로 개편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 그 결과 1929 년 9 월 권업모범장을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으로 개편되었다 . 통감부 시기 ‘모 범’을 보인다는 의미에서 창설되던 권업모범장은 그 사명을 다하고 이후부터는 ‘시험 연 구적 지도’ 기관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 일제는 1929 년 9 월 17 일자로 「권업모범장관제」를 폐지하고 , 칙령 제 279 호로 「조선총독 부 농사시험장 관제」를 공포하였다 . 권업모범장 때는 본장의 사무에 대한 분장규정이 따 로 없었다 . 내규로서 서무계 , 종예계 , 토지개량계 , 분석계 , 곤충병리계 , 축산계로 조직되 어 있었다 . 그러나 농사시험장으로 개편되면서 「사무분장규정」은 전문분야에 따라 서무과 , 종예 부 , 화학부 , 병리곤충부 , 축산부 , 잠사부 및 여자잠업강습소를 두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