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page

제 4 강 _ 수원의 농업과 권업모범장 | 73 에 거류하는 일본인 미곡상들이 중심이 되어 이른바 ‘농사시험장 ( 農事試驗場 ) ’을 설립하 자고 주장하였다 . 일본인 미곡무역상이 중심이 되어 한국에 농사시험장을 설립하여 , 한국 쌀의 개량을 부르짖고 나섰다 . 그러나 일제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농사시험장을 설치하여만 하겠다는 계획은 1904 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직후부터였다 . 한국정부에서도 1904 년 10 월 농 · 상 · 공의 실업에 관한 학술 및 기능을 가르칠 목적으로 농상공학교 ( 農商工學校 ) 를 서울에 설 립하고자 하였다 . 이와 더불어 농과 실습을 위해 1905 년 12 월 29 일 칙령 제 60 호로 「농상 공학교 부속 농사시험장관제」를 발포하고 , 그 실습농장을 뚝섬 [ 纛島 ] 에 설치하였다 . 일제의 통감부가 주도하는 권업모범장은 수원군 서둔평에 설치하기로 하였다 . 이 토지 는 원래 궁내부 ( 宮內府 ) 경리원 ( 經理院 ) 소관으로 통감부에서 차용하기로 하였고 , 그 외 필요한 민유지는 시가로 매수하기로 하였다 . 권업모범장은 1906 년 10 월 정리사업의 설계 를 마치고 , 11 월 2 일 공사에 착수하였다 . 이어서 신축공사를 하고 수원정거장부터 권업모 범장에 이르는 도로 및 논밭 27 정보에 경지정리사업을 하는 등 1906 년 말까지 시설과 설 비를 완성하였다 . 이와 같이 그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기초적인 시험 연구사업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면적이었다 . 일제는 한국정부 주도의 ‘농사모범장’ 설립계획을 무산시키고 , 1906 년 4 월 「권업모범장 관제」를 발포하고 , 그해 6 월 15 일 경기도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개설하였다 . 일제 통감부 에 의해 설립된 권업모범장에는 장장 이하 기사 ( 전임 6 인 )· 기수 ( 전임 8 인 )· 서기 ( 전임 4 인 ) 를 두었으며 , 면화재배협회의 위촉에 의해 목포에 출장소를 두어 면화재배사업을 감독 하게 하였다 . 이처럼 설립 초기 권업모범장의 전임 구성원은 20 명 내외에 불과하였다 . 권업모범장이 설립된 후인 1906 년 10 월 한국과 일본정부 사이에 이것을 한국에 이양하 는 문제에 대해 논의가 진행되었다 . 그해 10 월 26 일 한국정부에서 통감부에 권업모범장 인계에 대해 조회를 하고 , 11 월에 권업모범장의 사업은 종래의 경영방침을 변경하지 않는 다는 것과 기타 여러 조건 붙여 대한제국정부에 이양하였다 . 이에 따라 1907 년 4 월 1 일부 터 권업모범장은 한국정부의 관리로 옮겨지게 되었으며 , 권업모범장의 직원들은 모두 한 국정부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 그러나 권업모범장의 농업기술에 대한 연구와 조사 를 담당하던 기사와 기수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 이들 일본인 기사들은 한국정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