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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수여선의 개통이 가까워지면서 이미 수원에는 주변 각지에서 밀려든 농산물이 넘쳐나 수원실업협회 ( 水原實業協會 ) 를 필두로 곡물창고 설치운동까지 벌이고 있었다 . 35 ) 1930 년대 초의 수여선을 통한 운송은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여객의 비중이 더 많았고 , 철도 주변 지역의 인구 이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 그리고 1932 년을 전후해 경동철도 주식회사가 수원 , 여주 , 죽산 , 관주 등 내륙 각지의 자동차 운송망을 인수하면서 화물과 여객이 증가해 상당한 영업 이익을 누렸다 . 36 ) 수여선이 개통된 후 이존의 운송 체계는 수여선을 중심으로 개편되었는데 , 이 과정에 서 자동차와 우마차 중심의 기존 운송체계와 상당한 갈등을 빚었다 . 특히 수하물의 하역 과 운송권과 관련해 기존의 지역 하주 ( 荷主 ) 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조선운송회사와 독점 계약을 맺었는데 , 용인에서는 항의 소동이 일기도 하였다 . 37 ) 수여선을 건설한 경동철도주식회사가 일단 종점을 여주로 삼은 것은 기존의 남한강 수 운과의 연결 때문이었다 . 조선경동철도는 여주까지의 철도노선 개통 이듬해인 1932 년 여 주 하항 ( 河港 ) 에서 원주 부론면 흥호리 ( 興湖里 ) 까지 선박 3 척으로 하루 4 왕복의 영업을 개시하였다 . 경동철도가 여주 흥호리를 겨냥했던 이유는 흥호리는 조선시대 세곡을 보관 하던 흥원창 ( 興原倉 ) 이 있던 곳으로 일제시대에도 여전히 영서지방의 물자 집산지 기능 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1933 년 568 톤 , 1935 년 2 , 507 톤 , 1936 년 145 톤 등 원주 지역의 물동량이 줄면서 1937 년에는 경동철도의 수운사업은 포기하고 1935 년 9 월에 받 은 철도 연장 면허도 공사 실시를 포기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 한편 경동철도주식회사는 여주에서 신작로를 따라 화물자동차 노선을 개설하고 , 이후 양평 , 장호원 , 충주 등지로 화물 노선을 확장하였으며 나아가 이천 , 신갈에서 서울로 직행 하는 트럭 노선도 개설하였다 . 여객 수송에 있어서도 철도 연변의 버스회사를 직영화 , 계열화함으로써 철도선 주변의 35 ) 《每日申報》 , 1930 년 8 월 8 일 , < 京東鐵道開通後는 水原은 穀物 呑吐地 > 36 ) 철도청 , 『한국철도사』 , 1979 , 547 - 549쪽 . 37 ) 《동아일보》 1930 년 10 월 7 일 . < 非合運 壓迫 去益 露骨化 - 京東鐵道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