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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10 월경에는 공사용 건축열차가 이미 운행하게 되었다 . 7 ) 그런데 수원지역에서도 지금의 서수원쪽 노선으로 철도가 통과하게 되기까지는 우여 곡절이 있었다 . 애초에 일본의 건설회사는 사그내에서 동쪽으로 약간 방향을 틀어 지지대 고개의 서쪽산에 터널을 뚫고 대유평 ( 大有坪 ) 을 거쳐 화서문 밖 , 팔달산 기슭을 뚫고 상유 천 ( 上柳川 ), 대황교 ( 大皇橋 ) 동편으로 나가는 노선이었다 . 8 ) 문제가 된 것은 지지대 노선이 정조의 역사성이 깃든 지지대비 ( 遲遲臺碑 ) 와 화녕전 ( 華 寧殿 ) 이 있는 팔달산을 훼손한다는 것이었다 . 1902 년 4 월 28 일 이러한 이유를 들어 유기 환 ( 兪箕煥 ) 철도원 총재가 다께우찌 [ 竹內 ] 취체역에게 지지대 터널 공사 반대의사를 전달 하고 , 다께우찌는 다시 한국에 와 있던 구사가 [ 田下 ] 취체역과 함께 하야시켄스케 [ 林權助 ] 일본 공사에게 가서 해결해 달라고 하였다 . 그러나 그들은 합동조약의 제 2 조에 ‘선로의 부 설방법은 회사가 선정하는 기사의 측량에 따라 시공한다’는 조항에 따라 계획대로 강행 할 것을 결의하였다 . 9 ) 아울러 4 월 30 일 일본 감독은 철도원 총재를 찾아가 터널의 시공 위치는 지지대비에서 480 피트나 떨어져 있어 하등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였고 , 이 때 수원 부민이 남문 밖에 모 여 철도는 지지대를 통과할 수 없다고 반대 시위를 하였다 . 10 ) 한편 수원군수 김옥현 ( 金鈺鉉 ) 도 보고를 통해 팔달산은 화녕전이 있는 왕산 ( 王山 ) 이고 지지대도 소중한 곳이며 , 그 구간에는 전답분묘가 많아 민소 ( 民訴 ) 가 답지하니 어떻게 조 치할까를 묻고 있다 . 11 ) 며칠 후 유기환 총재로 일본 철도회사 기사에게 비교 노선을 답사시킴과 동시에 심상 훈 ( 沈相薰 ) 을 통하여 조정여론을 완화 시키고자 하였으니 뜻을 이루지 못하고 , 1902 년 5 월 9 일 하야시 공사가 다께우찌 , 구사가 두 취체역을 대동하고 경운궁으로 고종을 알현하 7 ) 조선총독부 , 『조선철도사』 , 1937 , 305 ~ 306 쪽 . 8 ) 광무 6 년 ( 1902 ) 6 월 5 일 《황성신문》 ; 이진호 , 「기전지방의 경인 · 경부철도사」 , 『기전문화』6 호 , 1989 , 기전향토문화 연구회 , 97 ~ 98 쪽 ; 이창식 , 『수원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 수원문화원 , 2003 , 142 - 160쪽 참조 . 9 ) 철도청 , 『한국철도사』 3 권 , 1979. 10 ) 상동 11 ) 《황성신문》 1902 년 6 월 5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