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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이후 1908 년 성당을 신축하고 남녀 80 명의 학생을 수용하는 진명학교 ( 進明學校 ) 를 1908 년 5 월 16 일 개교 , 교육을 통한 전교활동을 시작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 1910 년대 당시 교회 규모는 사제 2 명 , 전도사 7 명 , 신자 700 명으로 나타나고 있어 당 시 성공회의 발전상을 짐작할 수 있다 . 더욱이 1913 년 서울에서 성 피득 보육원을 수원으 로 이전하여 운영한 점은 특기할 만하다 . 한국성공회에서 유일하였던 성 피득 보육원은 1898 년 서울에서 설립되어 1913 년 수원교회 안에 자리 잡았던 것이다 . ▶ 옛 부국원 건물 ( 수원시 향토유적 제 19 호 )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상업적 침탈에서 농업경영과 맞물려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 이 종묘와 종자의 보급이다 . 권업모범장의 우량품종보급사업에 따라서 종자와 종묘의 보 급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 수원지역에 권업모범장으로부터 직접 배부되던 종묘와 종자 는 1910 년대 후반부터 수원읍내의 일본인이 운영하는 부국원 ( 富國園 ) 을 통하여 지주들에 게 판매공급 되었다 . 부국원은 주식회사로서 일본인의 자본금에 의해 설립되었다 . 1916 년 4 월 3 일 창립하여 수원면 산루리에 사무실을 두고 , 주로 종묘와 종자의 판매를 하며 , 농기구와 비료의 판매 및 농산물매매 등의 영업을 하는 일본인 주식회사로 발전을 거듭 하였다 . 1920 년대에는 순이익이 매년 1 만원이 넘는 회사로 발전했다 . 1930 년대에는 자 본금이 30 만원 , 불입금이 15 만원으로 일본인 대주주가 참여하여 운영해나갔다 . 부국원은 1942 년에는 자본금 30 만원 , 불입금 18 만원으로 여전히 대규모 회사로 군림하였다 . 부국 원 ( 富國園 ) 은 식민지 경제의 전위적 기구 역할을 수행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 해방 이후 에는 잠시 지방법원 청사 등으로 사용되었다가 내과의원 , 문화사 건물로 사용되면서 당시 지어졌던 2 층의 콘크리트 건물이 그 외형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수원가족여성회관 뒤에 위치해 있다 . ▶ 구 수원시청사 ( 등록문화재 제 598 호 ) 현 가족여성회관 본관 건물인 등록문화재 제 598 호로 지정된 ‘구 수원시청사’는 1950 년 한국전쟁의 전란으로 원래의 수원청사가 파괴된 뒤 만들어졌다 . 수원시청은 일제강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