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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제 2 강 _ 현장답사 신작로 근대를 품다 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 재판 과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방청객으로 참석하여 김향화의 의 로움을 지켜보았다 .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김향화는 형을 다 마치기 약 1 개월 전인 1919 년 10 월 27 일 가출옥되어 수원으로 돌아왔다 . 수원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김향화는 1897 년 7 월 16 일 생으로 본명이 순이 ( 順 伊 ) 였다 . 향화는 기명으로 꽃과 같이 아름다운 그녀의 명성에 걸 맞는 이름이었다 . 『조선 미인보감』을 보면 김향화는 원래 서울에서 태어나 어느 때 부터인지 수원에서 기생으로 이름을 떨쳤다 . 갸름한 얼굴에 살짝 주근깨가 있고 크지 않은 중간 키에 성격이 순하고 귀 여운 기생으로 검무와 승무에 능하고 , 가사 · 시조 · 경성잡가 등 노래를 잘하는 기생이었 다 . 쪽진 머리에 주홍 소매를 쥐고 탁 트인 목청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가락은 애절하면서 도 구슬프다고 기록되어 있다 . 김향화와 수원기생들의 3 · 1 운동은 관기의 후예와 전통예능의 전수자로서 보여준 민 족적 항쟁이었으며 , 일제의 강압적인 기생제도와 식민통제에 대한 생존의 몸부림이었다 . 오늘날 기생의 존재는 옛날이야기로 묻혀버렸다 . 하지만 기생도 우리 민족의 일원이었으 며 , 이 여성들의 재능은 대중예술이라는 장르로 계승되었고 , 당시 식민지 권력에 대항하 며 보여주었던 수원기생들의 민족적 의로움은 오늘의 교훈으로 이어지고 있다 . ▶ 성공회 수원교회 미 북장로교와 감리교 선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 선교를 시작한 교단은 영국 성공 회였다 . 영국성공회는 코르프 (C. J. Corfe, 1865 - 1921 , 高要翰 ) 초대 주교가 1890 년부터 1904 년까지 15 년간 한국에 처음으로 성공회를 전파하면서 시작되었다 . 그의 재직 중 마 지막 사업으로 벌인 것이 서울 · 인천 · 강화 다음에 네 번째로 수원지방의 선교를 시작한 것이다 . 수원지역은 1904 년 서울에서 파송된 송 전도사가 수원천 윗버드내 ( 상유천 ) 에서 전도를 하면서 시작되었다 . 이후 수원군 안용면 장지리 ( 현 공군비행장 ) 에 최초의 성공회 교회가 설립되었다 . 이듬해 1905 년 초대 관할사제로 브라이들 (Bridle, 부재열 ) 신부가 부 임하면서 수원 매교동 가옥을 매입하여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 이듬해 1906 년 현재 위치인 교동 11 번지 일대 4 , 000 여 평을 매입하면서 교동시대를 열었다 . 매입한 땅에 철조 망을 치고 전통 가옥을 성당으로 사용하였음을 1907 년 독일인 헤르만 산더의 사진이 잘 보여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