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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제 2 강 _ 현장답사 신작로 근대를 품다 麗 ) 하고 우아 ( 優雅 ) 한 정자 ( 亭子 ) 이기도 한 이곳에 앉으면 팔달산 서장대 , 장안문과 각건 대 , 동장대 그리고 광교산과 숙지산 , 멀리는 관악산 , 남쪽의 독성산 ( 禿城山 ) 등 화성과 화 성을 둘러싼 아름다운 풍광 ( 風光 ) 의 조화를 즐길 수 있는 요지 ( 要地 ) 이다 . 편액 ( 扁額 ) 은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라 노닌다는 뜻의 ‘방화수류정 ( 訪花隨柳亭 ) ’이 라 하였다 . 정조 ( 正祖 ) 를 모신 자리에서 채제공이 정명도 ( 程明道 ) 의 「우성 ( 偶成 ) 」이라는 시 ( 詩 ) 에 “雲淡風輕近午天 傍花隨柳過前川 時人不識予心樂 將謂偸閑學少年” ( 『二程全書』 卷 38 . 外書 明道文集 ) 서 방화수류 ( 傍花隨柳 ) 를 따서 정자이름을 지었는데 방 ( 傍 ) 자를 방 ( 訪 ) 자로 바꾸어 붙였다 . 편액은 전참판 조윤형이 썼다 . 용두위에 위치하고 있어 용두각 ( 龍頭閣 ) 이라고도 한다 . 1795 년 원행시에 이곳에서 정조는 활을 세발 쏘아 모두 맞히어 무 ( 武 ) 를 높이는 뜻을 보이었다 .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의 구획이 복잡한 듯 하지만 정자 안 쪽에 국왕과 근신들의 자리를 배치하고 , 일반신료들은 남쪽으로 길게 만든 공간에 상 ( 床 ) 을 놓고 마주앉을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또한 평상시에는 유락의 장소 로도 이용할 수 있도록 용연이란 연못을 파고 연못 가운데에는 작은 섬을 만들어 화목을 심어 동북각루와 어우러지게 꾸몄다 . 바로 이점이 비상시의 군사지휘소인 각루로서의 복 합적 기능을 충족시켜주고 있다 . ▶ 수원지역의 3 · 1 운동 수원지역의 3 · 1 운동은 3 월 1 일 수원면 화홍문 방화수류정의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4 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 많은 천도교도와 기독교도 , 유학자들 , 그리 고 농민 · 학생 · 상인들과 기생들까지 수원의 모든 민중들이 참여하여 독립의 의지를 불 태웠다 . 수원지역의 3 · 1 운동은 산발적이고 평화적인 시위도 있었으나 , 사전 계획 아래 조직적으로 격렬한 투쟁양상을 보여주었다 . 그 과정에서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파괴하고 , 갖은 악행을 일삼았던 일본순사들도 처단했다 . 수원지역의 3 · 1 운동은 일제강점기 대표 적인 독립운동이자 민족해방운동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