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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제 2 강 _ 현장답사 신작로 근대를 품다 독동신회는 구약과 신약성서 이외에 특별히 믿는 것이 없으며 성서 그 자체를 믿으며 , 교 회제도는 필요 이상의 조직을 하지 않으며 목회제도가 없다 . 행정상 필요한 임원을 선출 하여 위임할 따름이다 . 따라서 특별한 사제를 두지 않고 신자 모두가 사제로 계급의식이 없는 형제자매의 신앙인으로 생활하고 있다 . 1830 년경 영국에서 일어난 플리머드 형제운 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 플리머드 형제단 소속의 영국인 선교사 H.G 브랜드가 1888 년 일본에서 선교를 시작하자 이에 동참했던 노리마츠 마사야스 ( 乘松雅休 , 1863 ~ 1921 ) 가 한 국에 전도하면서 비롯되었다 . 동신교회 안에는 교회를 설립한 노리마츠 마사야스의 기념비가 있다 . 그는 1900 년 8 월 9 일 부인과 첫돌이 채 안된 아들을 안고 수원을 찾아왔다 . 기독교 선교를 위한 것으로 일 본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해외 선교 사례이다 . 처음 1900 년 9 월 성안 북수동 ( 장안동 ) 에 초 가집 한 채를 마련하여 수원에 정착함으로써 수원에 영주한 최초의 일본인이 되었다 . 노리 마츠를 특별히 기억하게 하는 것은 그가 여타의 일본인과 다른 생각과 삶의 태도를 보여주 었기 때문이다 . 그는 여타의 일본인들과 달리 한복을 입고 식기와 집도 한국식으로 생활하 면서 아들에게도 일본어를 가르치지 않고 한국어를 할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 그러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성서강론소 ( 聖書講論所 ) ’로 하여 조선인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 1909 년 8 월 김태정 ( 金泰貞 ) 이 수원천변 토지를 기부하고 신자들의 헌금과 협력으 로 한옥의 집회소를 지어 ‘수원 성서강당 ( 水原聖書講堂 ) ’이라 이름 붙였다 . 1917 년 일제 당 국의 요청에 따라 기독동신회 ( 基督同信會 ) 로 종교단체 등록을 하였다 . 1921 년 노리마츠는 일본에서 죽었지만 그의 뼈는 이듬해 광교산 묘지에 묻혔고 그를 기념하는 비석이 동신교 회 안에 서 있게 된 것으로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이었다 . ▶ 무형문화재전수회관 ■ 승무, 살풀이춤(경기도무형문화재 제 8 호) 승무는 승복을 입고 추는 춤으로 승복을 입고 춤을 추긴 하지만 불교의식에서 승려가 추는 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 대한제국기 승려춤이나 살풀이춤 , 궁중무용의 영향을 받아 점차 발전하였는데 , 나중에 광대나 기생들이 추는 춤이 되었다 . 옷차림을 보면 흰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