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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제 1 강 _ 수원, 한반도의 배꼽을 꿈꾸다 세력은 토착 자본적인 성격을 띠면서 수원의 상권을 철옹성으로 만들어갔다 . 이와 동시에 전통적인 경기남부의 군사적 중심지로서 수원은 정조 때 장용영 ( 壯勇營 ) 과 순조이후 총 리영 ( 總理營 ) 을 거쳐 근대시기에도 지속되어 중영 ( 中營 ) 및 지방대 ( 地方隊 ) 로 존속되었 다 . 이러한 군사적 영향력은 광범한 무과 출신자들을 배출하였고 이들의 상업적 진출을 가져왔다 . 조선시대 전국적 규모에서 서울과 평양 다음으로 수원은 무과 출신자들이 많았 던 상무적 전통이 강한 도시였다 . 수원이 안동이나 전주보다 인구가 적었을 때의 일이고 정조 때 장용영 외영이 수원에 설치되기 이전의 일이다 . 수원의 무과 출신자들의 광범한 존재는 조선시대 내내 이어진 전통이다 . 효종 임금이 “수원은 본래 무향 ( 武鄕 ) 이다 . ”라는 언급을 할 정도였고 , 인심이 질박하고 활쏘기에 능한 수원사람들이지만 글이 짧다는 평을 듣게 만들었다 . “ 이는 실질을 숭상하는 전통을 가져왔고 상업적 번영을 이끄는 견인차 역 할을 하였다 . 이들 무반을 중심으로 수원의 전통적 유지집단이 만들어졌고 이들의 경제적 역할과 의식은 근대 자강운동기 새로운 흐름을 만들 수 있었다 . 근대적 계몽기구 ( 기호흥 학회 , 국채보상운동 ) 와 종교 단체 ( 종로교회 , 성공회 , 천도교 ) 및 경제단체 ( 수원상업회의 소 ), 그리고 근대적 사립학교 ( 화성학교 , 삼일학교 , 상업강습소 - 화성학원 ) 의 설립을 이끌 었던 것이다 . 남양홍씨 , 연안차씨 , 수원최씨 , 전주이씨 , 김해김씨 , 나주나씨 , 해주오씨 등 전통적 유지집단이었던 이들은 서로 결혼이라는 혼맥을 통해 강고한 지역적 관계망을 구 축하며 경제적 · 정치적 권력을 향유하였다 . 이들 지역유지들의 강력한 카르텔은 수원의 지역적 특성과 견결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 그러나 1910 년 나라가 망하면서 수원의 변화는 수원역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인 상권과 전통적 남문 상권의 경합과 길항관계에서 설명될 수 있다 . 일본인 자본과 정치세력에 의 한 남문 상권의 침식은 견디기 어려운 수난이기도 했다 . 동시에 일제강점기 민족사의 분 수령이라 일컫는 3 · 1 운동의 가장 강력한 항쟁과 순국을 한 땅이 수원이었다 . 우정면 화 수리 주재소의 가와바타 ( 川端豊太郞 ) 순사와 수원경찰서에서 서신면 사강리에 파견된 노 구찌 ( 野口廣三 ) 순사부장을 처단하는 치열한 항쟁을 펼쳤다 . 이는 당시 국내에서 유일하 게 일제 경찰을 처단하는 과감한 투쟁이었다 . 이에 일제는 신경질적이고 치졸한 보복으로 제암리 · 고주리 양민학살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 이는 ‘수원사건’으로 불리며 제국주의 에 반대하는 민족해방 투쟁이 결국 인권과 평화를 위한 역사적 당위임을 각인시켜주었다 . 한편 일제강점기 지역유지들은 친일과 항일의 계선을 넘나들며 생존의 전략을 고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