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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4 . 수원을 알면 한국이 보인다 . 수원은 전통적으로 호남으로 가는 해남로 ( 제주로 ) 에 위치해 있었고 조선후기 영남으 로 가는 길까지 수원을 거쳐 감으로써 삼남대로의 요충지에 자리한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 지였다 . 삼국시대 이래 경기만 일대를 아우르는 군사적 요충지였고 , 수주 ( 水州 )· 수원 ( 水 原 ) 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전통적 대도시의 위상을 지녀왔다 . 전통적으로 대도회지는 전주 · 나주 · 상주 · 경주처럼 고을 주 ( 州 ) 와 중원 · 서원 · 남 원 · 철원 등과 같이 벌판 원 ( 原 ) 을 이름으로 쓰고 있다 . 삼국시대 지명이 한자화 되면서 죽 주 · 인주 · 합주 등 고을명칭이 주 ( 州 ) 로 대부분 쓰였다 . 그러다 조선시대인 1413 년 ( 태종 13 ) 주 ( 州 ) 자 이름을 갖고 있는 도호부 이하의 군 · 현의 이름을 산 ( 山 ), 천 ( 川 ) 두 글자 중 하 나로 개정토록 함에 따라 죽산과 인천과 합천 등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 따라서 수원 ( 水原 ) 이라는 이름에는 전통적 대도회지의 풍모를 갖는 역사적 자부심이 담겨 있는 셈이다 . 더욱이 조선 후기 정조 때 화성 ( 華城 ) 이 건설되면서 신도시로서 면모를 일신하며 조선 의 대표하는 성곽도시이자 경제적 기반시설을 갖춘 계획도시로서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 서울 남쪽의 지방 도시이지만 일국적 견지에서 보면 독자적 특수성을 지닌 도시로 성 장하였다 . 이러한 역사적 전통과 저력은 수원로 ( 水原路 ) 의 개설과 더불어 1950 년 경부철 도의 부설 및 권업모범장과 농림학교의 설치로 이어져 수원은 한국 농업의 메카로 부상하 게 되었다 . 통일벼를 비롯한 숱한 농작물의 품종개량이 수원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 한편 조선후기 이래 수원 우시장은 전국의 3 대 우시장으로 일컫는 규모의 경제를 갖췄 고 , 상여와 상포 ( 喪布 ) 및 곡비 ( 哭婢 ) 까지 갖춘 수원의 상부도가 [ 喪布都家 ] 는 경기남부를 아우르는 규모였다 . 수원의 상부도가는 현재의 보람상조 같은 상조회사의 전신으로 이미 조선후기 상업적 성공을 일궜던 셈이다 . 상을 당했을 때 머리에 썼던 백립 ( 白笠 ) 은 수원 의 또 다른 생산품으로 각광받았고 , 이러한 전통은 근대시기에 직물공장의 성장으로 이어 졌다 . 선경직물로 대표되는 수원의 직물공업은 삼성전자로 대표되는 전자산업과 더불어 한국경제의 자본주의적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였다 . 수원 우시장과 더불어 수원장시 ( 水原場市 ) 의 중요성은 경기남부의 큰 장이었던 안성의 안성장과 용인의 김량장을 포섭하는 더욱 큰 장으로 성장하면서 수원을 중심으로 하는 경 제적 재편을 이루었다 . 이에 따라 수원깍쟁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며 경제적 성장을 이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