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page

| 17 제 1 강 _ 수원, 한반도의 배꼽을 꿈꾸다 한 사대부들의 성장을 가져왔다 . 조선전기 양주에서 조선후기 광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 였던 셈이다 . 이에 고려 때 양주 땅으로 광주로 나가는 한강의 나루인 양진 ( 楊津 ) 보다 이 후 광나루 , 즉 광진 ( 廣進 ) 이 보다 널리 알려진 사실과 연결된다 . 그렇게 양주와 광주로 대 표되던 양광도였던 경기도 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교통의 요충지로서 군 사적 중요성이 부각된 수원을 재발견하게 된다 . 임진왜란 당시 독산성 전투와 병자호란 때 광교산 전투의 승리는 무향 ( 武鄕 ) 수원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각인함과 동시에 서울 남 쪽의 주요한 군사적 보장처 ( 保藏處 ) 로 수원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 더욱이 임진왜란 이후 경상감영이 대구로 고정하면서 김천을 거쳐 추풍령을 넘어 청 - 천안 - 수원으로 하여 서울로 올라가는 영남대로가 활성화 되었다 . 이로써 수원은 호남과 영남으로 갈 때 반드시 지나가는 삼남대로의 목울대가 되면서 지리적 중요성이 더욱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 . 이러한 수원의 재발견에 더하여 정조의 화 성건설이 그 흐름을 결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 이에 수원은 조선후기 양주와 광주를 제 치고 경기도를 대표하는 대도회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결국 조선시대의 역사는 양 주와 광주를 누르고 수원이 경기도의 수부도시가 되어 가는 역사라 일컫는 것이다 . 한편 경기도의 근대사는 양주와 광주 및 수원의 해체 과정이라 할 수 있다 . 조선의 개 국공신 정도전이 「신도가 ( 新都歌 ) 에서 “옛날에는 양주고을이여 / 그 경계에 새 도읍의 지 세와 풍경이 빼어나도다 . ”라고 읊었듯이 새 도읍 한양은 본래 양주 땅이었다 . 그 양주 고 을은 현재의 양주시 · 남양주시 · 의정부시 · 동두천시 · 구리시 그리고 서울특별시 광진 구 · 노원구 · 도봉구 · 중랑구로 나뉘어졌다 . 또한 땅이 넓어 이름조차 광주 ( 廣州 ) 였던 그 것은 과천시와 의왕시 및 광주시와 성남시 · 하남시뿐만 아니라 서울특별시 강남구 · 강 동구와 송파구 · 서초구 일부로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 이는 1960 년대 이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인구가 집중하면서 발생한 한국 근대사의 또 다른 단면이기도 하다 . 물론 수원 역시 바다를 낀 광대한 영역을 잃고 화성시와 오산시 그리고 수원시로 나뉘어져 있는 현 실이다 . 그러나 수원은 양주나 광주와 달리 핵심적인 도시중심을 수원시로 유지한 채 그 역사를 이어왔다는 점에서 이들과 다른 양상을 갖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