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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의원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봉수당을 허물어 버린뒤 빨간 벽돌의 근대식 병원건물을 지었 다 . 이것은 화성행궁의 가장 중요한 정궁 역할을 하는 봉수당을 허물어 자혜의원을 설치 함으로써 조선왕실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근대적 건물을 지어 식민지의 위용을 알리는 이 중의 목적을 갖는 것이었다 . 그리고 낙남헌 건물은 식민통치 기구인 수원군청으로 개조하 여 사용하였고 , 화성행궁의 장용외영 군사들이 입직숙위 하던 군영은 경찰서로 사용하며 식민 통치를 강화하고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다 . 우리의 전통적인 상징이던 화성행궁이 훼손되는 것을 기생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 었다 . 화성행궁은 고종 황제와 순종 황제도 능행길에 나섰다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했다 . 이런 상징적인 공간에 식민지 시혜를 알리고자 눈 가리고 아웅 하던 근대식 병원이 들어 섰다 는 것은 기생들의 민족적 감정을 충분히 건드리고도 남음이 있었다 . 기생이라는 존재 는 식민지로 재편되기 전까지는 관청에 소속된 관기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볼 때 화성행 궁은 기생들의 고향집과도 같은 곳이었다 . 정조대 이후로 수원은 화성유수부가 되어 도시 가 확장되었다 . 그리고 관기들이 소속되어 활동했던 곳이 화성행궁이었다 . 이곳에 일제 의 병원과 경찰서 , 식민통치기구인 군청이 들어서 자신들을 통제하고 있다는 현실이 수원 기생들에게는 더욱 치욕적이었을 것이다 . 또한 일제가 공창제도를 확장하면서 제일 먼저 실시한 것이 기생들에 대한 정기적인 성병검사였다 . 기예를 자랑하던 기생들이 한낱 매춘부 취급을 받으면서 정기적인 성병검 사를 받는다는 것은 일종의 모욕이었다 . 이것은 기생들의 고귀한 존재성을 무시하고 기생 들을 창기와 같은 존재로 전락시켜버린 일제의 식민통제책의 본질이었다 . 이러한 제도가 기생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 수원기생들의 3 · 1 운동은 단순한 즉자적인 의기의 행동은 아니었다 . 일제의 < 기생단 속령 > 등과 같은 식민 통제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다 . 수원기생들은 이미 3 · 1 운동을 일으 키기 전 고종 황제가 돌아가심을 누구보다도 슬퍼하였다 . 수원기생들은 고종 황제가 돌아가셨을 때 나라 잃은 설움을 토해내었다 . 당시 고종 황 제의 승하 발표가 나자 기생 , 광대 배우들은 모두 휴업을 하고 근신에 들어갔다 . 그리고 덕수궁 대한문 앞에 백성들이 모여 곡을 할 때 기생들도 함께 참여하였다 . 수원기생들은 고종 황제가 돌아가시자 일절 가무를 중단하고 근신하였다 . 앞서 얘기한 것처럼 수원기생 20 여명은 깃당목의 소복을 입고 수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