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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수원군 수원면에서의 만세운동은 3 월 1 일 화홍문 방화수류정 부근에서 수백명이 만세 를 부르면서 시작 되었다 . 이는 김세환의 지시로 김노적 , 박선태의 주도 아래 학생층이 중 심이 되어 서울과 동시에 시작한 만세운동이었다 . 이후 3 월 16 일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 동이 다시 시작되었고 , 팔달산 서장대와 동문 안 연무대에 수백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면 서 시가지 종로를 통과하였다 . 그러던 중 군중들은 일본 경찰과 소방대 , 헌병에 의해 강제 해산을 당했고 , 주동자가 붙잡혀 갔다 . 그러자 시내에서는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 하며 철시투쟁을 벌여 , 체포되었던 사람들은 석방되었다 . 이때의 만세운동은 수원읍내에 거주하고 있던 상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 일본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상권을 침탈당하고 있 던 상인들의 피해의식은 매우 컸으며 , 적극적인 저항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 3 월 23 일 수 원역 부근의 서호에서는 700 명이 만세운동을 벌였다 . 3 월 25 일 장날에 다시 청년학생이 주도가 되어 약 20 명의 학생과 노동자가 시장에서 만세를 불렀고 , 운동을 주동한 10 명이 붙잡혀갔다 . 이후 주민들은 3 월 28 일까지 시내 곳곳에서 20 ~ 30 명씩 모여 산발적으로 만 세를 불렀다 . 수원군 수원면의 3 · 1 운동은 수원기생들의 3 · 1 운동과도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 다고 할 수 있다 . 젊은 청년학생들과 시장 상인들 , 노동자들의 만세운동은 기생들의 만세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 운동을 주도했던 세력들의 활동 무대는 남수리와 북 수리 일대로서 화성 ( 華城 ) 성내 ( 城內 ) 였고 , 기생조합이 남수리에 있으면서 북수리 성내시 장을 중심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 수원면의 집단적이면서도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장날 장터에서 계속되는 가운데 수원 기생들의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 3 월 29 일에 수원 기생 약 30 여명이 건강검사를 받으러 가던 도중 자혜의원 ( 慈惠醫院 )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 수원 기생들의 만세가 있은 직후 야간에는 상인과 노동 자 등이 합세하여 곳곳에서 만세를 불렀고 일본인 상점에 투석하여 창유리를 파괴하는 등 만세운동 의 양상은 격렬해졌다 . 3 월 29 일 만세운동의 핵심은 자혜의원 앞 기생 들의 만세운동이었다 . 수원기생들의 만세운동은 수원기생 김향화 공판 (『매일신보』 1919 . 6 . 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