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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무관학교가 설립되어 민족교육의 산실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던 항일운동의 요람이었다 . 아울러 교수로 일하고 있는 이세영과 재무감독 이동녕 등은 신흥무관학교의 실질적인 중심 인물들이었다 . 이로 볼 때 양성중학교는 제 2 의 신흥무관학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양성중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국어문전 , 대한신지지 , 대한국사 , 유년필독 등을 통하여 한글 , 한국사 , 한국지리 등을 가르쳐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 ( 4 ) 경신참변 이후의 독립운동 활동과 체포 1919 년 3 . 1 운동이후 만주지역에도 수많은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이 조직되었고 , 활발한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 이에 일본군들은 1920 년 간도로 출병하여 만주지역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 이때 임면수도 해룡현 북산성자 ( 北山 城子 ) 에서 일본군 토벌대에 체포되어 중국에서 추방되었던 것이다 . 임면수는 정일택 , 한원기 , 이용도과 함께 1920 년 6 월 12 일 밤 해룡현 북산성자 삼도가 에 재주하는 김강의 집에서 김강의 부재중에 그 지역의 일본경찰관 및 그 부근에 거주하 는 친일 조선인 등을 암살하고 남만철도연선에 거주하는 동지와 기맥을 통하여 아편의 밀 수입을 통한 이익으로 상해임시정부에 송금하려는 협의로 체포되어 조선으로 추방당하였 던 것이다 . 이에 철령 ( 鐵嶺 ) 으로 압송되어 가던 중 , 한국인 경찰 유태철 ( 柳泰哲 ) 의 도움으로 중국 인 여관에서 번잡한 틈타 탈출에 성공하였다 . 낮에 숨고 밤에 걷는 일정으로 14 일 만에 길 림성 이통현 ( 伊通縣 ) 고유수 ( 孤楡樹 ) 한인 농촌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고 , 그곳 박씨 집에 은둔하였다 . 그 후 장춘을 거쳐 부여현에 도착하여 안승식 ( 安昇植 ) 의 도움으로 그의 집에 서 겨울을 날수 있었다 . 그러나 1921 년 2 월 경 길림시내에 잠입하여 활동 중 결국 밀정의 고발로 길림영사관에 체포되었다 . 임면수는 평양감옥에 압송되어 고문과 매로 전신이 마비된 후에야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 그러나 고향 수원에는 거처할 방조차 없었다 . 결국 1930 년 11 월 29 일 56 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