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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여하였다. 그후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서울진공작전올 준비하던 이천 의병진이 통족의 배반으로 무너지자, 남 은 의병들을 이끌고 김하락과 함께 영남지역으로 부대를 이동하면서 항 전하였다. 도중에 김하락과 헤어져 이천으로 돌아온 구연영은 기독교에 입문하 면서 일제에 대한 투쟁방법을 무력투쟁에서 평화적인 애국계몽으로 바 꾸게 되었다. 1905년‘을사조약으로 또 다시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나자 구연영 은 의병시절의 동지들과 교인들을 중심으로 구국회(救國會)를 조직하여 이천을 비롯한 인근 지역을 순회하면서, 포교활동과 함께 애국계몽운동 을 앞장서서 이끌어 나갔다. 가는 곳마다 군중들을 모아놓고 일본의 야욕을·폭로하고 일진회를 규 탄하는 모임을 열어 백성들의 일본에 대한 경각심을 높였고, 상점들이 일제히 문을 닫도록 하는 상가철시운동을 벌려 항거하기도 하였다. 구 연영의 아들 구정서 역시 전도사가 되어 부친을 도와 부자가 함께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이천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1907년 7월 16일 이천장터에서 총살형으로 부자가 함께 순국하였다. 1979년 9월 6일 교인들과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05년부터 순국할 때 까지 담임목사로 있던 이천중앙감러교회 안에 구연영 • 구정서 부자 순 국추모비를 세웠다.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