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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자 당시의 신문들이 이것을 〈기내 4대사건〉이라고 하여 크게 보도 함으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일본경찰에서는 서울과 경기도내 경 찰병력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범인찾기에 나섰다. 결국 이수홍 의사는 부친의 장례를 마치고 다시 이천읍으로 돌아왔다 가 11월 8일 이천경찰서 무장 경찰대에 의해 체포되고 마는데, 현상금을 탐낸 가까운 친척의 밀고로 이 의사의 정체가 탄로가 난 때문이었다. 그후 재판과정에서 이 의사는 자신이 임시정부 주만참의부에 소속된 독립군의 신분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자신이 한 일이 독립전쟁을 수행 하기 위한 당연한 임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을사년 이후 20여년간을 우리 군대는 너희 일본을 상대로 항명 혈전 을 하지않은 날이 없다- 더구나 기미년 독립만세 이후 8년 동안을 우리 독립군들은 죽융도 두려워 하지 않고 피를 흘리며 싸웠고, 8년 간에 걸 쳐 동원된 군대가 3만명으로 적들을 무수히 죽였다. 그러나 이것은 국 경방면에서 일부전쟁에 불과하다. 이제 우리들은 국내로 깊숙이 들어와 서 너희들의 소굴을 도륙하려는 것이며, 이것이 우리 독립군의 직무인 것이다. 너희들은 지금 한 • 일 양국이 전쟁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결국 이수홍 의사는 사형언도를 받고 1929년 2월 27일 잃세의 한창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하였다. 사형언도가 내려지자 담당 변호사 가 항소할 것올 권했지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인데 어찌 구차 한 생명을 보존하려 구구한 변명을 하겠느냐고 거절하였다. 형장에 가서도 태연한 모습으로,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