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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과거의 의병 통지들과 함께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 강압으로 체결하고 외교권을 비롯한 조선의 주권을 빼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을사 보호조약이다.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다시 전국척인 의병항쟁이 맹렬하 게 일어났는데, 이천지방의 경우는 당시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사정 을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무렵부터 이천에서는 구연영이 조직한 구국회 (救國會)가 민중들을 대상으로 애국계몽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구연영온 서원보 션교사와 함께 이천감리교회를 중심으로 광주 • 양근 • 여주·음죽· 진천 ·음성과 충주·제천 • 원주 지방까지 다니면서 포교 를 하는 한편, 1905년 이천구역 답입목사가 되면서 과거의 의병 통지들 과 교인들을 중심으로 구국회를 조직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구국 회는 이천 • 여주 둥지에서 조약체결을 반대하는 성토대회를 열어 군중 시위를 ’유도하고, 상가들이 일제히 문을 닫도록 하는 상가철시를 통한 저항운동을 벌렸다. 구국회는 한편 친일파들의 모임으로 일제의 시녀노 릇을 하는 일진회를 규탄하면서 무력항쟁이 아닌 평화적인 군중집회를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구국회는 1907년 정미의병운통이 일어나자 더욱 맹렬한 항일구국운동 을 벌렸는데, 이틀을 눈의 가시처럼 여긴 일진회에서는 일본군에게 구 국회의 활통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민중들 사이에 반일감정이 크게 전파 되리라고 밀고하여 마침내 일본군 수비대가 구연영을 체포하기 위해 출 통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실을 미리 안 구국회의 회원이 구연영에게 달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