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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동학농민혁명 약사 조선정부의 재정적자와 사회부정부패 그리고 일본의 경제침탈은 이 땅의 농민들을 도탄에 빠트렸다. 그래서 이 지역 동학농민군은 4227(1894)년 봄부터 각 지역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862 : 상주농민항쟁 1891 : 상주, 함창농민항쟁 4227(1894) 9.18 : 동학교주 최시형의 기포령 이후 북접의 상주농민군 봉기 준비 9.22 : 농민군 수천명이 상주성을 점령함. 9.28 : 일본군이 상주성을 공격, 농민군 100여명이 학살당하고 패퇴함 9.29 : 왕조정부가 영남소모사를 임명함 10.19 : 민보군을 흡수하여 소모영 설치 10.22~12.2 : 김석중의 유격병대가 상주, 모동, 화동, 화북, 청산, 용산 등에서 농민군을 색출. 체포하여 처형함. 상주농민군은 태평루(21명) 모동장터(6명 이상) 화동(3명) 화령장터(3명) 화남광주원(2명) 평온(3명 이상) 청산월남정(2명) 청산소사동(2명) 등지에서 처형됨 12.11 : 용산에서 북접농민군이 상주유격병대와 접전하여 승리함 12.12 : 남사정에서 농민군 4명 처형됨 12.14 : 태평루에서 농민군 4명 처형됨 12.18 : 일본군과 상주유격병대가 보은종곡리 북실에서 농민군 2,600명을 살육하여 농민군 완전괴멸됨 12.22 : 남사정에서 농민군 10여명 처형됨 12.23 : 태평루 앞에서 농민군 3명 처형됨 4228(1895) 1.24 : 영남소모영 해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