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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용의가 출중하여 지도자의 품격을 지니고 있어서 전도야지(全刀也只)라는 애칭이 붙었다. 동학이 인시천(人是天)의 사상을 내걸고 "사람이 하늘이다"고 외치자, 하늘과 같은 사람들이 살 길을 찾아 모여 들었다. 예천에도 금당실, 맛질, 화지 등지에 동학 접소(接所)가 생겨 벼슬아치와 토호의 부정과 무도를 징치하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의사는 일찌기 금당실 일대의 동학 지도자가 되었다. 1894년 봄 전봉준이 처음 전라도 땅에서 반봉건(反封建) 반외세(反外勢)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의 횃불을 들자 전국적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예천 땅에서도 이 해 음력 8월 일대 봉기를 결행했도다. 의사는 금다실 지역에서 운량도감(運糧都監)의 소임을 맡아 군량미 조달의 책임을 졌도다. 68세의 나이인데도 그의 의기는 죽지 않았으니 장하도다. 의기로만 뭉쳐진 수천 명의 예천 동학농민군은 수접주 최맹순과 군사 지도자 윤치문의 지도 아래 일본의 침략 마수를 꺾기 위해 옷깃을 떨치고 일제히 일어섰다. 이른바 농민군을 토벌하려고 만든 집강소의 민보군(民堡軍)과 한내에서 큰 싸움을 벌였지만 무기의 열세로 인해 처절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하나 이는 상주와 함께 경상북도 일대에서 벌어진 가장 격렬했던 전투였다. 관군과 민보군은 동학농민군을 잡는대로 효수와 생매장을 해댔다. 아아, 무슨 원혐(怨嫌)이 있길래 외적을 앞에 두고 동족끼리 이런 잔혹한 짓거리를 했던가. 의사는 몸을 빼서 산속이나 농막을 전전하면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살았다. 끝내 1900년 나라가 더욱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며 한많은 목숨을 거두었도다. 임들은 한을 남겄으나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임들의 구국정신을 민주와 통일의 밑거름으로 삼고,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