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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병은 부안(부령)김씨 김두회의 차남으로 1831년 1월 21일 부안군 상서면 내동마을에서 탄생, 유년시절부터 두뇌가 명석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의지가 강직하면서도 우국충정이 충만한 인격으로 성장하였고 결혼 후 미개발된 상선마을에 이주, 광범위한 농지개발로 크게 번창하여 부안 군내의 유수한 농사 재벌이 되었다. 당시는 조선말 개화기로 외세의 침략과 수탈이 극심하고 국내적으로 누적된 부정부패, 매관매직, 탐관오리의 횡포 등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있었으며 이러한 국가 사회의 비극상에 비분강개하던 김기병은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이 "보국안민" 등의 기치를 들고 동학농민혁명을 추진하자 결연히 동참하여 부안 기포 두목이 된 후 정열적으로 의기투합한 농민들을 설득 취합하여 부안농민혁명군을 조직하고 부안 변산 해창에 있었던 국방용 무기고를 접수하여 농민군을 무장시킨 후 우덕동 앞 들에서 무기사용법을 훈련시켜 주민들로부터 환호와 경탄을 받았다. .1894년 4월 1일 부안군 하서면에서 500여명의 농민군으로 조직을 확장하여 지휘하며 부안성을 무혈 함락하고 백산성 총집결에 참여 전봉준 장군과 합세한 후 4월 7일 황토현 전투, 4월 27일 전주성 함락, 10월 21일 우금치 전투 등 모든 전투에서 전봉준 장군과 함께 하였으나 구체적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우금치 전투에서 참패한 동학군은 관군의 체포와 총살대상이 되었으나 김기병과 생존부하 동학군은 굴하지 않고 부안에 잠입, 지하농민혁명 운동을 계속하다가 주민의 밀고로 관군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부하 8명과 함께 1895년 2월 10일 부안읍 동문 밖 형장에서 향년 65세로 처형되었다. .국가에서는 봉건제도의 개혁과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수호를 위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고 이를 계승 발전시켜 민족 정기를 선양할 목적으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2004.3.5. 법률 제 7177호) 제정으로 본인의 명예회복 및 손자녀까지 국가 유공자 유족으로 결정하였고 이어 2007년 1월 26일 법률 제 8277호에 의거 고손자녀까지 확대하여 국가 유공자 유족으로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