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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여가만 있으면 동자들과 합심하여 태극기와 격문을 만드는 등 일제 거사의 기회만을 기다리고 계시었다. 일제의 재판기록에 의하면 공은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평평읍장날을 기하여 여러 동지들과 협력 학생들과 군민들에게 태극기와 격문을 배포하고 공은 선두에서 대장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경찰서로 향하는 중 일본 헌병대와 충돌 다수의 사상자를 내는 대난투전이 벌어졌으나 불행하게도 일경에게 체포되시어 목포감옥으로 이송되시었다가 다시 대구형무소로 송치되어 옥고를 치르셨다. 조사를 받을때에는 악독한 일경의 고문에도 굽히지 않으시고 초지일관 항거하여 일경들을 아연실색케하시었다. 출감후에도 애국단체 신간회 나산면 책임자로 활동하시어 일경의 요시찰인으로 지목되어 만사부자유스럽게 지내셨으며 고문의 여독으로 신음하시던중 1949년 음11월 28일 시거하시었으니 대한민국정부는 1983년 3월 15일 대통령표창으로 공의 공적을 추앙하고 영령을 위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