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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학생 동원과 태극기 독립선언문을 유인 등사기를 이용하여 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거사 당일 유인물을 어물적자 속에 은닉 운반해 읍민과 학생들에게 분배하고 정오를 기해 북산 중복의 구암에 대형 태극기가 게양됨을 신호로 시장에 온 주민과 학생 등 남문 밖에 운집한 4천 여 군중의 선봉에 서서 진두지휘하며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셨으니 기 만세의 함성이 하늘을 찌르듯 강진골의 지축을 뒤흔들었고 태극기의 물결이 보은산하를 드덮혔다. 이에 공은 일경에게 만세 의거 시위 주모자로 억류되여 동년 4월 6일 장흥 검사국을 경유 대구 복심법원으로 송치 기소되여 복역 8월 실형을 언도받고 영어의 질곡을 격으시고 석방 귀향하여 옥고의 후유증을 요양하시며 일제 사회와 거리를 두고 은둔생활을 하며 대한 자주독립을 위하여는 민족의 교육계몽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통감하여 애국사상을 고취시키고 야학을 지도하시며 농촌계몽운동과 민족정기를 선양하는데 헌신 노력하시던 중 1945년에 조국 광복을 맞이하셨다. 평생을 孔孟之道(공맹지도)를 신조로 삼아 생활하셨으며 경학원 장의를 역임하시니 累有聲績이 鄕稱以居士云하고 1966년 67세로 타계하셨다. 1976년 강진읍 낙하정에 삼일탑이 건립되니 의사록에 등재되셨고 정부에서는 공이 숭고한 애국정신을 발휘하여 조국자주독립운동에 헌신 노력함으로 국가발전에 크게 이바지함을 인정하여 1992년 제83806호로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으며 대한민국의 오늘은 국가유공자의 공헌과 희생 위에 이룩된 것임으로 이를 애국정신의 귀감으로서 항구적으로 기리기 위해 2001년 7월 31일 정부에서는 공에게 국가유공자 증서 제 550~9484호를 추서하니 공의 기 공적을 추모하고 애국의 얼과 뜻을 계승하고 만세에 길이 기리기 위하여 공의 묘전에 삼가 이 비를 정성을 다하여 건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