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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재임하였고 51세시 독립을 위하여 이시영 외 제등과 독립당을 조직 56세시 이봉창 의사를 지시 1932년 1월에 일본 천황을 저격 사건에 실패하고 동년 4월에 윤봉길 의사를 지시 상해 홍구공원에서 괴수 백천 대장 이하 수명을 폭살시켜 전세계를 진동케 하고 양의사는 왜의 형장에서 청춘으로 순국하시다. 57세시 국적 신임을 얻어 장총통과 상봉정치자금 항일투쟁 제반경비를 어더 이청천 이범석과 군관학교를 설립 독립군 창설 한중합작 투쟁을 토의하고 63세에 임시주석 추대하고 익년에 정부를 중경에 환도하고 각 정당을 통합 독립당 광복군을 조직하여 일본에 선전포고하였다. 카이로 회담에서 독립보장을 받았던 바 70세시 을유 8월 10일 일본의 항복으로 역사는 일조에 바뀌였다. 국무위원 김학규 조성환 이시영 엄항섭 박찬익 등과 11월 조국에 도착 망명생활 27년간에 귀국 즉후 모스코바 삼상회의에서 발포한 신탁통치 적극 반대하였고 71세시 국민의회 부주석에 선임되였다. 남한단독선거로 조국분단을 염려 반대하고 73세시 4월에 통일를 위하여 남북협상차 출정시에 踏雪野中去(불서야중거) 不須胡亂(불수호난) 隨作後人程(수작후인정)이라 하시다. 익년 74세 6월 26일 흉탄에 서거하시다. 전토광복하니 기충국애족함이 백세사표로다. 혹일호남지사 정재연방협회하야 언우사지전말하고 청우열사추모지문하니 여불문이나 회장지임으로 감기 21동지회 계승순화하여 자손만대에 평화와 안락을 보유할진져 대한민국 61년 기미 광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