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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포고문을 국내외 동포에게 배포하는 등 의거 를 감행하시어 왜헌들을 극도로 당황케하였다. 선생은 서기 19196뇬 안동현에서 문응극 강응오선생과 공동 투자로 삼달양행이란 곡물무역상을 경영 동 지방 고학생들에게 학자금 조달및 독립사상을 고취하여 독립운동의 역군을 양성하시며 서기 1917년에는 채수일 명문흡선생과 역시 공동투자로 상원양행이란 곡물무역상을 경영하시며 서간도에서 손우청선생이 경영하는 광제병원에 거금을 단독투자하시였으니 이는 오르지 국권회복및 독립운동자금을 조성하는 사업이였다. 선생은 오찬근 이근석과 의병장 임병찬 곽한일선생에 의하여 조직된 독립군과 긴밀한 연락을 취고 안동현에서 성락규 조성환선생에게 인도 총동암살과 군자금모금의 임무를 지령 입국활동케하였다. 선생은 서울 이태의선생외 유림과 면암 최익현 의암 유인석 연재 송병준선생의 사당 3현묘를 건립코저 전국 유림의 규합운동을 전개하여 항일및 독립정신을 고취하였으며 왜헌의 탄압으로 중단은 되였으나 유림계는 물론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남기셨다. 선생은 서기 1918년 6월 불행하게도 국권회복운동 주모자로 왜헌에게 체포되시어 해주형무소에서 옥고10년을 치르시면서도 잔인무도한 고문과 치욕속에서 의지를 굽히시지 않았으며 출옥하신후에도 국내외 독립지사및 유림과 내통 독립정신을 고취 광복운동을 계속하던중 조국광복을 맞이했다. 선생은 신생민주국가건설에 앞장스셨으며 한국광복의용군 총사령 대한무관학교 최고 고문및 국민협의회장등을 역임하시었으며 이시영 조성환선생과 국가의 간성이 되는 대한무관학교를 설립하고저 건국협진회를 조직하고 사학연구회를 설립하시는등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분투하시다가 서기 1952년 3월 향년6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치시다. 선생의 광복운동은 본래 비밀리에 이루어졌던 관계로 그 공적을 다 살피지못하는 마음 애석할뿐이며 선생의 광복운동은 기미3.1운동에 효시가 되고 항일투쟁은 광복의 저력이 되였으니 선생의 높은 충의와 대절은 자주와 자유를 갈망하는 이 민족 불굴의 표상이며 인류정의 규현으로서 숭고한 애국충절의 뜻을 남기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