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page

동학혁명 95 이제 영호도회소를 이끌었던 주요 구성원에 대하여 알아볼 차례이다. 먼저 대접주 金仁培(1870∼ 1894)는 전북 금구(현 전북 김제군 봉남면 화봉리) 출신이다. 그는 김해김씨로서 그의 4대조인 成鉉대에 전북 김제에 살기 시작하였다. 316) 그의 生父 顯彪(1852∼1923)는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는 점으로 보아 그 지역의 향반출신으로 보인다. 317) 그는 백부 顯謨(1844∼1873)의 양자로 들어가 부인 金堤趙氏와의 사이에 아들 鍾成과 鍾哲을 둔 어엿한 가장이었다. 318) 그런데 김인배는 일명 龍培로 불렸으며, 불과 스물네살의 나이로 농민군 10대 지도자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319) 그는 일찍부터 동학에 입도하여 활동하다가 1894년 백산대회에 김덕명과 함께 참여하였다. 320) 이 때를 전후하여 김개남의 측근세력으로 활동하다가 전주화약이후 김개남을 따라 전라좌도의 남동부 지역을 관할하는 책임을 맡게 된 것으로 보인다. 순천과는 전혀 지역 연고가 없는 그가 어떻게 영호도회소의 대접주로 발탁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아마 김개남의 각별한 신임이 있었기에 20대의 젊은 나이로 영호대접주로 활동하였을 것이다. 영호도회소의 주요 구성원으로 활동한 여타의 인물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들의 신분이나 경제적 처지 등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한편, 광양의 옥룡면 접주인 徐允若 亨若 형제는 운평리 상평 출신으로 경제적으로 상당히 부유한 편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옥룡출신의 先達 卞樂仲는 '東魁'로서 자칭 선봉장이라 하며 말을 타고 영호남을 넘나들며 활동한 농민군 지도자였으며, 李京嶋 역시 ‘동괴’로서 영호남을 무대로 활동한 농민군 지도자였는데, 그의 부친은 옥룡면 面任을 역임한 바 있었다. 321) 이로써 볼 때 영호도회소의 주요 구성원들의 사회 경제적 기반을 열악한 것으로만 볼 수는 없다. 또한 순천의 진사 劉在述이 농민군에 적극 가담하였다. 322) 그가 어떠한 활동을 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혹 영호수접주인 劉夏德이나 1890년을 전후하여 광양에서 동학을 전파한 劉壽德과 관계될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다. 실제 농민군의 지도자들은 대체로 학식을 갖춘 자 가운데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원하려는 의로운 자가 많았다고 한다. 323) 영호도회소의 농민군 지도자 역시 그러하였을 것이다. 물론 일반 농민군으로 활동한 사람들은 가난한 농민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리라 믿어진다. 영호도회소의 접주나 접사 성찰 동몽 등 주요 직책을 맡았던 사람들은 김인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316) 『金海金氏京派統合譜』 丙一編(1991), 881∼882쪽. 317) 위의 책, 883쪽. 318) 위의 책, 881쪽. 319) 이이화, 『발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한겨레신문사, 1994), 100쪽. 320) 위와 같음. 321) 「光陽廉聞記」, 『각사등록』 54, 89쪽. 322) 황현, 『번역 오하기문』, 228쪽. 323)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