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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93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순천 출신의 박낙양일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요컨대, 전라좌도 지역에 대한 김개남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순천 지역에서 전봉준을 따르던 추종세력은 집강소 시기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이제 김인배가 주도한 영호도회소에 관한 구체적인 궁금증을 풀어 보기로 하자. 먼저 영호도회소의 명칭에 관한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영호도회소는 '嶺湖大都所'로 알려져 왔다. 그것은 1993∼4년 동학 100주년 기념의 신문 연재에서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302) 이후 학술회의에서 문제가 제기됨으로써 영호도회소로 수정되었다. 303) 따라서 영호도회소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304) 하지만 명칭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도회소 앞에 왜 '嶺湖'라고 冠稱하였는지에 대한 해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섬진강 하류지역의 순천 광양 및 하동 진주 지역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지 않았나 한다. 305) 당시 일본 측에서도 영호도회소의 대접주인 김인배가 전라 경상 양도의 都統領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306) 이로써 볼 때 영호도회소는 경상 서부와 전라 동부 지역을 총괄하는 의미에서 '영호'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상 서부지역을 영호도회소의 영향권 아래에 두지는 못한 것 같다. 끊임없이 시도하였지만, 일시적으로 하동과 진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따라서 영호도회소는 실질적으로 전남 동부지역을 관할한 농민군 조직이라 할 수 있다. 영호도회소는 순천도호부의 읍성에 본부를 두고서 낙안군 광양현 좌수영(여수)을 관할하였는데, 현재의 순천 광양 여수 지역이 해당된다. 아마도 고흥 보성 구례군 지역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을 것이다. 요컨대, 영호도회소는 김개남의 영향아래 전남 동부지역 농민군의 구심점으로서 이 지역의 통치권을 장악한 상태로 활동하였다. 307) 따라서 영호도회소는 전라좌도의 남부지역에 해당하는, 그러니까 현재의 전남 동부지역을 총괄하는 임무를 띤 농민군의 지휘부인 셈이다. 영호도회소는 지리적 利點을 고려하여 순천에 본부를 두게 되었으리라 믿어진다. 순천은 예로부터 小江南이라 불려질 정도로 물산이 풍부한 유통의 중심지이자, 주위에 큰 산과 바다에 인접한 영/호남 사이의 大都會地였다. 308) 따라서 전남 동부의 중심지인 순천에서 인근 지역을 관할하기가 편리하였을 302) 예컨대, 무등일보 「동학혁명일백년」과 광주일보 「농민혁명일백년」 및 전남일보 「동학100년」의 연재물에서 집필자들이 그렇게 사용해 왔다. 303) 전남대 호남문화연구소 주최(「동학농민혁명100주년기념학술대회 발표요지」, 1994년 6월3일)의 학술발표에서 필자는 김양식의 「전남 동부지역의 농민군 활동」의 발표에 대한 토론을 통해 영호도회소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 것이라고 문 제를 제기한 바 있었다(「동학농민혁명 100주년기념 학술대회 토론」, 『호남문화연구』 23<1995>, 483∼486쪽 참조). 이후 김양식은 앞의 발표요지를 논문으로 작성하면서 영호도회소로 수정하였다(앞의 논문, 『호남문화연구』 23, 49∼83 쪽). 한편, 이 글은 김양식의 연구 성과에 힘입은 바가 컸다. 304)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80쪽과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4∼5쪽 참조. 305) 김양식, 앞의 논문, 54쪽. 306)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7쪽. 307) 김양식, 앞의 논문, 54∼55쪽. 308) 『승평지』, 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