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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사기가 오른 장흥의 연합 농민군은 4일 벽사역 점령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였다. 5일에는 장흥읍성을 점령했는데, 이때 장흥부사 박헌양 등 96명이 목숨을 잃었다. 270) 그러나 그 피해는 훨씬 컸던 것 같다. 일본군은 당시 장흥부사 이하 500명이 죽고 관아와 민가 3,700여 호가 소실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271) 7일에는 강진읍성을 점령했는데, 수성군 도통장 김한섭 등 수성군 지도부 6명이 희생되고 읍내 가옥들이 소실되었다. 272) 이어 10일에는 강진 병영을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장흥과 강진을 휩쓸었던 것이다. 당시 장흥의 연합 농민군 지휘부는 장흥의 이방언 이인환 구교철 이사경, 금구의 김방서, 화순의 김수근 조종순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의 공세를 두려워한 강진현감 이규하, 병영의 병사 서병무는 나주로 도망하여 오직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할 뿐이었다. 당시 농민군들이 벽사역을 점령하는 상황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음력 12월) 4일 적이 화포를 소아 벽사역의 公 廨 와 民舍를 불태워 모두 잿더미로 만들었다. 불꽃과 연기가 하늘을 온통 덮고 들에 가득찼다. 인민들은 혼비백산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문재국 소장문 서 ; 『전남동학농민혁명사』, 421쪽에서 재인용). 농민군이 벽사역을 불태우는 연기와 불꽃에 백성들이 크게 놀라워했다는 것이다. 장흥읍성은 흔히 長寧城이라 불렸는데, 이 전투에서는 농민군중 여성지도자의 활약이 돋보였다. 당연히 크게 화제가 되어 일본의 신문에도 실릴 정도였다. 1) 장흥의 民人 등이 잡아 바친 여자 동학은 그들이 ‘神異夫人’이라 일컫는데 요사스런 말을 하여 어 리석은 백성들을 현혹한 일대 요물이다(「양호우선봉일기」, 1895년 1월 3·4일자, 『동학농민전쟁사 료총서』 15, 332쪽) 2) 동학당에 여장부가 있다. 동학당의 무리 중에 한 명의 미인이 있는데, 나이는 꽃다운 22세로 빼어 나기가 傾城之色의 미인이라 하고, 이름은 李召史라고 한다. 오랫동안 동학도로 활동하였으며, 말을 타고 장흥부가 불타고 함락될 때 그녀는 말 위에서 지휘를 하였다고 한다. 일찍이 꿈에 天神이 나타 나 오래된 祭器를 주었다고 하며, 동학도가 모두 존경하는 神女가 되었다(『國民日報』 1895년 3월 5 일자, 위의 책 22, 499쪽). 270) 당시 장흥성 전투중 사망한 관군측 피해가 96명이며, 96명의 위패가 장흥읍 永懷堂에 모셔져 있다. 271)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17쪽. 황현 역시 사망자가 400-500명이나 되었고, 관아가 모두 불탄 것으로 기록하였다(『번 역 오하기문』, 294-295쪽). 272)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17쪽 ; 황현, 『번역 오하기문』, 2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