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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85 철폐하고 守城所를 설치하였다. 다음달 18일에는 병영의 수성군 지도부는 민간인을 징발하여 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음력 11월에는 동학교인을 죽이거나 집을 파괴하기까지 할 정도로 대범해졌다. 뿐만 아니라 수성군측에서는 농민군 지도자에 대한 회유 활동도 전개하였다. 이처럼 적극적인 수성군의 활동은 전봉준의 2차 봉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봉준의 동원령에 따라 장흥에서는 이방언의 주도로 농민군을 동원했는데, 그 규모가 5,000명으로 알려져 있다. 266) 이들이 북상하자, 장흥과 강진의 수성군 활동이 적극성을 띠게 된 것이다. 수성군측은 강진 병영의 병력과 무기를 활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흥 벽사역의 역졸 800여 명을 동원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농민군측도 이에 따른 대응책을 강구했는데, 전봉준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오지영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강진 병영과 장흥부에서는 관리배들이 다시 발호하여 동학당을 침범한다는 급보가 논산 대본영에 들 어왔다. 강진 본영으로 말하면 육군을 양성하는 호남의 重鎭이요, 장흥부도 또한 雄州巨邑으로 유명 한 곳이라 장흥부사와 강진병사가 密謀하고 동학대군이 북진하고 없는 틈을 타서 앉아 있는 도인들 을 잡아다가 가두고 침략이 심하다 하는지라 이 급보를 듣고 정히 걱정하던 차 금구대접주 金邦瑞가 자원 출전하겠다 하는지라 대본영에서는 그를 곧 허락하여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강진으로 향하여 내려갔다(오지영, 『동학사』, 501쪽).” 동학농민군이 북상한 틈을 노려 장흥부사와 강진병사가 교인들에 대한 탄압이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위의 내용중 ‘동학대군이 북진하고 없는 틈을 타서’라고 한 점으로 보아 이방언이 동원한 5천명의 농민군 중에 일부는 북상한 것으로 보여진다. 267) 강진의 경우에도 金炳泰가 3천명을 동원하여 읍내에 주둔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268) 이들 역시 적어도 일부 병력은 북상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런 연유로 장흥과 강진의 농민군이 공백상태에 처해지자, 전봉준은 김방서에게 3천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내려가 남부지역을 안정시키도록 조처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리하여 김방서는 음력 11월 초 장흥 흑석시까지 진군하였다. 이들은 같은 달 중순까지 장흥부 외곽인 사창 웅치 회녕 대흥 등지에 농민군을 집결시키며 군사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하였다. 더욱이 광주 나주 남평 보성 능주 화순 등지에서 활동중이던 농민군의 일부 병력도 장흥으로 속속 남하해왔다. 269) 이들은 음력 12월 초하루 장흥부 외곽의 사창에 주둔했는데, 군세가 대략 10,000-30,000명 정도를 헤아렸다. 266) 오지영, 『동학사』, 482쪽. 267) 『전남동학농민혁명사』의 415-416쪽에는 장흥의 농민군이 북상하지 않은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268) 오지영은 김병태가 해남에서 농민군을 동원했다고 서술하였으나, 백산대회에는 김병태는 강진의 장령, 김도일은 해남의 장령으로 서술되어 있다(『동학사』, 482쪽). 269) 이병수, 『금성정의록』 갑편 ; 『전남동학농민혁명사』, 418-4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