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page

8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그러한 점을 정면으로 비판한 게오르규의 『25시』라는 소설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런데 더욱 부끄러운 사실은 110년 만에 돌아와 화제가 되었던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유골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는 점이다. 즉, 1996년에 홋카이도대학에서 돌아왔지만 20년동안 사실상 방치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으며, 안장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 수난을 겪고 있는 것이다. 원래 유골이 발견된 진도에 두차례나 안장을 추진했으나 진도군의 무성의로 무산되었고, 그후 황토현전적지와 김제 구미란 전적지에 안장하려던 계획도 반대의견에 부닥쳤다. 우여곡절 끝에 전주시가 유골을 화장한 후 완산전투지 역사공원에 안장하는 것으로 최근에 결정했으나, 일부에서는 역사적 가치를 고려하여 유골을 영구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유골의 보존은 형법 제161조 위반에 해당되어 영구 보존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문화재로 등록이 된다면 유골 보존이 가능하기 때문에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이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 중이라 한다. 이에 대해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역사적 가치는 인정하지만 안장해 드리는 것이 유골에 대한 예의일 뿐만 아니라 유골의 DNA를 근거로 두 개의 흉상을 제작해뒀고 유골 모형도 제작되어 있으므로 (흉상과 모형을) 전시하여 역사적 가치를 전달할 계획”이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262) 이 유골들이 진도에서 ‘채집’된 것이고, 진도의 농민군과 연관된 점이 분명한 이상 가능한 진도에 안장 혹은 전시하는 것이 원칙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라남도나 진도군이 이 문제를 외면한 것은 더더욱 부끄러운 행태라 하겠다. 한편, 강진과 장흥은 동전의 양면처럼 활동한 것으로 드러나므로 1차 봉기와 마찬가지로 함께 다루고자 한다. 장흥은 1894년 음력 6월 20일경부터 집강소 활동이 시작된 것으로 믿어진다. 장흥의 자라번지(현 부산면 금자리 효자마을)에서 집강소의 활동을 감지할 수 있는 일들이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라번지 집강소에서는 ‘동학도인’들이 죄인들을 잡아 징치하였다는 것이다. 263) 이 집강소는 이사경 접주가 주도한 용반접으로 흔히 알려져 있는데 장흥에서는 묵촌의 이방언접을 능가할 정도였다. 264) 강진에도 얼마후인 음력 7월 초순 집강소를 설치하여 토호세력을 징치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265) 장흥과 강진에서 집강소를 중심으로 폐정개혁이 추진되자, 기존의 신분질서와 수취체제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그 중에는 吾南 金漢燮이 대표적 인물인데, 그는 이방언과 같이 任憲晦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이들은 음력 7월말 부임한 장흥부사 朴憲陽과 함께 조직적으로 대응책을 모색하였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대체로 박기현의 『日史』에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강진에서도 吏校들이 음력 9월에 읍성 안에 도소 설치를 저지하였으며, 이어 강진 병영에서도 도소를 262) 『전남일보』 2015년 2월 11일자, 「쉴곳 없어 떠도는 진도 동학 농민군」. 263) 박기현, 『日史』, 갑오 6월 20일자. 264)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404쪽. 265) 박기현, 앞의 책, 갑오 7월 3일자 ; 『전남동학농민혁명사』, 4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