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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81 해남의 집강소는 현재의 해남읍 남동리에 설치되었으나 음력 9월경 철폐되었다. 246) 집강소의 폐지는 제2차 봉기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남에서는 金春斗 金春仁 형제와 白長安, 謀士 全由禧, 南里驛 대접주 金信榮, 三寸面 접주 尹周憲, 梨道面 접주 金順五, 縣山面 접사 張克瑞 등이 활동하였다. 해남의 농민군들은 이웃인 진도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우수영 공격을 주도하였다. 또한 이들은 음력 12월 초순이후 장흥과 강진의 전투에도 가담하였다. 같은 달 15일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패배한 후 이들은 강진 大口面 七良을 거쳐 해남으로 돌아왔다. 수세에 몰린 해남의 농민군들은 많은 희생을 치렀다. 그 이유는 경군 및 일본군이 해남을 비롯한 전남의 서남부지역으로 농민군을 몰아붙여 섬멸하는 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247) 특히, 장흥 석대들 전투이후에 일본군이 농민군의 재기를 막기 위해 더욱 잔인한 살육작전을 전개한 때문이었다. 장흥 강진 전투 이후로는 많은 비도를 죽이는 방침을 취하였다. 필경 이는 小官 한 사람만의 생각으 로 한 것이 아니라 훗날에 재기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다소 살벌하다는 느낌을 살지라도 그렇게 하라는 公使와 사령관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53-54쪽). 위의 내용은 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던 일본군 後備步兵 獨立 第19大隊長 南小四郞이 보고한 것으로, 당시 주한일본공사 井上馨과 병참사령관 伊藤裕義의 명령으로 대규모 살륙작전을 전개했음을 실토하고 있다. 이들은 농민군이라 판명되면 무조건 죽이는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이 여파로 수성군이 붙잡은 농민군들을 지방관으로 하여금 처형시켰는데, 해남 강진 장흥을 비롯한 광주- 전남에서 농민군 약 1,500명 가량이 죽임을 당했다. 248) 이때 해남에서는 250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음력 12월 19일 해남읍 부근의 전투를 고비로 전사하거나 체포된 농민군들이 처형된 것이다. 해남읍 부근에서 수천명의 농민군이 결전을 벌였지만 결국 일본군의 신무기에 고배를 마셨다. 앞서 언급한 해남의 농민군 지도자 전유희와 김신영이 이때 체포되었다. 249) 좀더 예를 들자면, 음력 12월 22일 이도면 접주 김순오, 교장 朴益賢, 집강 李銀佐, 別將 朴士仁, 교수 金夏振 등이 체포되었다. 250) 24일에는 銀所面의 수성군은 해남으로 피신한 무안의 농민군 지도자 배규인을 체포하여 일본군에 인계하였으며, 25일에는 화일면 수성군이 김춘두 형제를 붙잡아 나주에 주둔하는 일본군 대대로 압송하였고, 이 일로 수성군측은 포상을 받았다. 251) 그리고 246) 박찬승, 「1894년 호남 남부지방의 농민전쟁」, 『1894년 농민전쟁 연구』 4(역사비평사, 1995) ; 『근대이행기 민중운동의 사회사』(경인문화사, 2008), 155쪽. 247)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47 60쪽 ;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472-473쪽. 248)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62쪽. 249)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18쪽. 250) 위의 책, 634쪽. 251) 위의 책, 6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