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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79 않았다. 그가 구례를 출발할 때 40∼50마리의 우마에 재물을 가득 실어갈 정도였으니, 그의 탐학이 얼마나 가혹하였는지 알만할 것이다. 심지어 농민군을 체포하였다가 풀어주는 대가로 돈을 받았던 까닭에 그가 오기 전에 농민군을 죽여 버리는 경우가 많았을 정도였다. 그는 1895년 음력 1월 11일 구례접주 임정연과 접사 梁柱臣을 軍陣 앞에서 포살한 후 순천으로 출발하였다. 임정연은 1924년에 간행된 『求禮續志』에 의하면, 경남 丹城의 巫人으로 전해지는데, 1894년을 전후해서는 구례군 光義面 絲織洞에 살고 있었다. 238) 그가 살던 마을에는 동학교인들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그는 같은 마을의 李起玉과 광의면 대산리 유산 마을의 梁君燮 등과 힘을 합해 농민군을 조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39) 그런데 임정연의 죽음을 안타까워 한 구례 사람들은 그를 추모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240) 그것이 『求禮郡史』에 채록되어 있는데, “접주야 접주야 임접주야 그 많던 군사 다 어디두고 구리실 막바지에 낮잠자느냐”라는 내용이다. 그와 이기옥은 화엄사 올라가는 방향의 쑥골에서 체포, 처형되었다. 그의 시신은 광의면 지천리 구리실 부근에 묻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구례현감은 구례의 농민군 7명을 수성군, 이른바 ‘의병소’로부터 인계받아 장위영의 지시에 의해 처벌하였다. 일반 농민군으로 참여하여 이렇다 할 잘못이 없는 농민군들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잡아들여 행적을 조사하였다. 대부분의 농민군들은 체포되거나, 아니면 자신의 생활 터전을 버리고 멀리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유제양의 從弟는 수성군의 召募使로 활동하였는데, 일본군의 모함을 받아 서울에 가서 스스로 갇혔다고 한다. 241) 구례군에서는 농민군을 진압하거나 회유하는 과정에서 줄잡아 3,500여 냥이 소요되었다. 242) 좀더 구체적으로 세목을 알아보면, 음력 4월 포군 50명을 강진 병영으로 파견한 비용으로 1,122냥, 招討陣에 소 3두와 말 7필을 보내는 비용으로 약 391냥, 우선봉진에 575냥, 목면 50필, 일본군에 437냥, 고흥접주 유복만 귀화시 선무사에게 지급된 1천냥 등이었다. 그리고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한 손해에 대하여 정부는 1893년분 세금 가운데 절반을 면제해주었다. 243) 한편, 구례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매천 황현과 그 저술에 대하여 간단한 언급이 필요하다고 본다. 황현은 한말의 뛰어난 시인이자 우국지사로 유명하며, 또한 『매천야록』과 『오하기문』의 저자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저술 중에 『오하기문』은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가장 풍부한 사실을 담고 있다. 비록 그가 동학농민혁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였지만, 저술 자체가 갖는 의의는 손상되지 않을 것이다. 244) 또한 『오하기문』이 구례에서 저술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238) 박준성, 「농민군 활동지 곡성 구례」, 『예향』(1993년 6월호, 123쪽. 239) 무등일보 1993년 11월 7일자 「동학혁명일백년」. 240) 무등일보 1993년 11월 7일자 「동학혁명일백년」과 전남일보 1994년 6월 22일자 「동학100년」. 241) 『구례 유씨가의 생활일기』 상, 25쪽. 242) 『각사등록』 54(국사편찬위원회, 1991), 705쪽. 243) 위의 책, 714쪽. 244) 김창수, 「황현의 『동비기략』 초고에 대하여」, 『천관우선생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정음문화사, 198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