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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77 수세에 몰린 남원의 농민군들은 음력 11월말 박봉양의 민포군과 남원의 민포군에게 읍성마져 내주고 말았다. 전라좌도의 농민군 본영이 수성군의 손에 다시 들어갔으며, 농민군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과정에서 인접한 구례의 농민군들도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농민군의 지도자나 접주들은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도망하거나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으며, 일반 농민군의 상당수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들을 체포하려는 관군들의 활동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구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구례의 농민군은 戰意를 상실한 반면, 토호와 향리 세력은 이제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즉, 그들은 농민군들에게 적대적인 행동을 표출시켰으며, 아예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당시 구례의 농민군에 대한 진압 상황은 아래와 같다. (음력) 11월15일 요즘 동학의 잔당들이 도망하여 각 읍에서는 의병을 만들고 각 마을은 방어대책을 세워 동학배를 체포하고 괴수를 박살냈으나 추종자 중 다수는 법망을 빠져나가 혹 그들은 埋殺하기 도하여 적이 의병으로 둔갑하는 경우도 십중팔구였으니 더욱 가증스럽다. 「甲擾傳」을 지었는데 갑은 갑오, 혹은 으뜸을 의미한다(『구례 유씨가의 생활일기』 상, 24쪽). 음력 11월 중순경에 이미 농민군들은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한 수성군, 이른바 ‘의병’이 여러 지역에서 결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흔히 ‘民砲’라 불렸는데 의병과 유사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230) 농민군 지도자의 대부분은 그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체포, 생매장당하기도 하였다. 유제양은, 농민군 가운데 일부가 ‘의병’으로 변신하여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다고 개탄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어느 정도 진정되어가자, 유제양은 동학에 관한 저술을 남겼는데, 그것이 바로 「甲擾傳」이다. 현재는 전하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황현(1855∼1910)의 『梧下記聞』과 비슷한 인식으로 서술되었으리라 믿어진다. 그는, 농민들이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와 폭정에 시달린 점은 인정하면서도 정부에 저항하여 무장폭동을 일으킨 것은 잘못이라고 이해하였다. 231) 그런데 구례의 수성군 세력은 海鶴 李沂(1848∼1909)를 중심으로 음력 12월 3일 결성되었다. 232) 양반 유생인 이기는 전북 萬頃 출신으로 구례에 살고 있었다. 233) 그러던 중 그는 음력 12월에 구례의 토호와 향리세력들에 의해 맹주로 추대된 것이다. 그는 농민군을 무찌를 계책을 세워 民砲軍을 동원하여 읍성을 굳게 지키는 한편, 혁명에 가담한 농민들을 색출함으로써 읍내의 치안을 230) 황현, 『번역 오하기문』, 295쪽. 231) 『求禮 柳氏家의 생활일기』 상(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91), 24쪽. 232) 황현, 『번역 오하기문』, 295쪽. 233) 이기, 『海鶴遺書』(국사편찬위원회, 1971 ; 1984), 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