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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기범이 떠나감에 미쳐 춘경·응삼 등은 장수로 들어가 목적을 달성하고 여세를 몰아 연재에 이르렀 다. 산꼭대기에 함정과 구덩이가 많다는 말을 듣고 소 수십 마리를 모아 뿔에다 병기를 묶어 앞에 세 워 몰고나가 칼이나 화살에 찔릴 것에 대비하였다. 비록 구덩이에 떨어진다 해도 소가 이미 평평하 게 메워 밟고 지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이것이 상황에 가장 적합한 계책이라고 자신하였다. (중략) 봉양은 군사들을 엄중히 단속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적이 산꼭대기에 이르렀을 때를 헤 아려 천여 개의 총을 일제히 발사하였다. 총소리는 산골짜기를 진동시켰고 북을 두드려 쫓아내자 소 들이 놀라서 뒤돌아 달아났는데 미친 듯이 울부짓고 어지럽게 뛰어오르며 뿔로 찌르고 무참히 짓밟 아 뿔에 찔리고 밟혀죽은 자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멀리서 동아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 리는가 싶더니 위에서 큰 돌이 굴러내려와 산이 무너지고 절벽이 떨어져 나갔다. 적은 엎어지고 자빠 져 서로 겹쳐누워 머리가 터지고 허리가 끊어져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봉양은 밤이 깊었으므로 더 이상 추격하지 못하고 다만 북과 징을 우뢰처럼 치고 바라를 울려 마치 곧 아래로 쳐내려가는 것처럼 하였다. 적은 너무 놀라서 앞을 다투어 도망하였는데 남원으로 달아났다. 남원에 이르러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했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277쪽). 다소 장황하게 인용하였지만, 당시 남원의 농민군과 운봉의 민포군 사이의 공방전이 얼마나 치밀한 준비아래 전개되었는지와 농민군의 계책이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진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요새와 다름없는 운봉을 공격하다가 방아재(碓 峙)에서 참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228) 한편, 임정연이 지휘하던 구례의 농민군은 泉隱寺를 거쳐 지리산 자락을 끼고서 가파른 고개길을 걷고 있었다. 아직까지 남원 농민군이 참패하였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구례의 산동면 위안리 부근에서 비로소 패전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은 발길을 돌려 구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운봉전투의 패배는 전라좌도의 농민군들을 守勢로 몰리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1894년 음력 10월 중순 김개남은 전봉준을 후원하기 위해 전주를 거쳐 충청도로 출발하였다. 남원에 주둔하던 나머지 농민군들은 음력 11월 박봉양이 지키고 있던 운봉을 공격, 점령한 후 영남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을 구상중이었다. 이는 아마도 관군과 일본군의 세력을 분산시키는 한편, 나아가 부산의 일본군이 경남을 거쳐 전라도로 이동하려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당시 남원에 잔류하여 운봉 공격을 주도한 농민군의 접주는 고흥 출신의 유복만, 담양의 남응삼, 태인의 鄭昌奎 金煉九, 진안의 이사명, 금구의 金鳳德, 임실의 崔準弼(承雨) 등이었다. 229) 그리고 남원의 농민군 접주는 김홍기 黃乃文 李圭淳 李起東 朴世春 유태홍 邊洪斗 崔鎭岳 沈魯煥 趙東燮 金祐則 등이었다. 이들은 각기 농민군을 통솔하고 음력 11월에 방아재( 碓 峙)에서 운봉의 박봉양 민포군과 접전하였다가 패하고 말았다. 228) 남원군종리원 편, 「天道敎南原郡宗理院」, 『宗理院史 附東學史』(1924). 229) 「天道敎南原郡宗理院」과 최병현, 「南原郡東學史」, 「종리원사 부동학사」(1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