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page

동학혁명 75 북쪽 지역으로 진출하여 합류하거나 독자적인 활동구역을 확보한다면 경상도에서의 군사작전은 한결 쉽게 전개할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다. 물론 구례와 남원의 일부 농민군들은 순천의 영호도회소 농민군들과 함께 진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224) 당시 남원에서는 고흥 출신의 유복만과 담양 출신의 남응삼, 남원 출신의 김홍기 등을 중심으로 농민군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들은 먼저 운봉과 기맥이 닿아 있는 장수를 공격하여 운봉 함락의 제물로 삼고자 하였다. 즉, 남원의 농민군은 지척에 위치한 운봉을 위협하기 위해 남원에서 100여 리 이상 떨어진 장수를 유린하였던 것이다. 225) 장수 공격은 남원 출신의 황내문, 담양 출신의 남응삼 등이 주도하였는데, 박봉양이 지키는 운봉을 위협하는 것 뿐만 아니라 군수물자를 확보하려는 목적도 포함되었던 것 같다. 장수를 점령하여 충분한 군수물자를 확보한 이들은 군사를 움직여 유복만 등이 기다리는 남원군 산동방으로 돌아와 운봉공격을 준비하였다. 한편으로 이들은 구례의 林定然 접주에게 연락하여 운봉을 협공하자고 권유한 듯하다. 구례의 농민군들도 남원의 농민군의 계획에 기꺼이 동조하였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구례 접주 임정연은 농민군을 광의면 연파리에 집결시켰다. 요컨대, 남원과 구례의 농민군들은 남과 북에서 운봉을 협공할 의도였던 것이다. 하지만 박봉양이 지키고 있는 雲峰은 천연의 요새와 다름없었다. 뿐만 아니라 박봉양은 주민들을 잘 결속시켜 사기도 매우 높았다. 226) 이러한 사실이 알려져 운봉 인근 지역의 아전들과 주민, 그리고 양반 가문의 부녀자들은 농민군을 피하기 위하여 운봉으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농민군들은 운봉을 ‘눈알에 낀 바늘’처럼 생각하였던 것이다. 227) 오죽하였으면 전봉준과 김개남도 운봉을 탐내면서도 6만이나 되는 대규모의 군대를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위세만 과시하였겠는가. 그것은 운봉을 함락하는 일이 대단히 어려운 사실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호남지방의 양반과 토호세력, 그리고 영남 우도의 군현들은 오로지 운봉에 기대하고 있었다. 운봉이 무너지면 전라좌도의 군현이 모두 농민군의 수중에 떨어질 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역의 점령은 시간다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원과 구례의 농민군들도 운봉을 점령하기 위해 신중하게 군사작전을 짰다. 이번에야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남원의 농민군들은 우선 구례의 농민군과 협공작전을 펼치기로 합의하였으며,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장수를 먼저 공격하여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둔 바 있었다. 이제 운봉을 점령하기 위해 자신들이 고안한 秘策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다음의 내용이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224) 『古文書』 2(서울대 규장각, 1987), 406쪽. 225) 황현, 『번역 오하기문』, 273쪽. 226) 위의 책, 275쪽. 227) 위의 책, 276∼2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