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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점으로 보아 진실로 동학의 사상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결과 그는 동학에 들어갔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적극 포교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조규하는 현감으로 재직할 때부터 농민군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는 다른 지방의 농민군일지라도 맞이하고 전송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더욱이 그는 上輿菴에서 김개남을 만나 자신의 사촌의 아들을 그에게 딸려 보내었다. 또한 자신도 동학에 입도하여 김개남과는 서로를 ‘접장’이라고 불렀다. 김개남도 조규하에게 편지를 보낼 때에는 자신을 낮추어 접이라고 지칭하였다. 223) 조규하의 경우, 농민군이 두려워서 비굴한 자세를 보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도 동학에 들어가고 조카를 입도시킨 점에서 보면 반드시 그렇게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농민군이 지향한 바와 활동 내용 그리고 동학 사상에 찬동하여 동학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양반신분에 속하는 사람들도 동학에 들어간 경우가 많았는데, 특히 구례 지역이 두드러진 경우라 하겠다. 한편, 남원에서 전라좌도의 농민군을 통솔하는 김개남은 구례를 군수물자의 보관장소로 이용하였다. 아래의 기록이 그러한 사실을 알려준다. 개남은 남원에 있을 때 가짜 명령으로 남원의 山東坊과 구례 지방에서 토지 매결마다 쌀 7말씩 징수 하여 화엄사에 보관하였다. 남원을 출발함에 이르러서 사촌형제의 아들 아무개에게 그것을 관장하도 록 하였다. 납품을 독촉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거두어들인 것이 300여 섬이나 되었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273쪽). 김개남은 농민군의 2차봉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군수물자를 원할하게 조달하기 위하여 남원과 구례 지방을 중심으로 토지 1결당 쌀 7말을 거두어들였다. 거두어들인 쌀 300여 석을 화엄사에 보관한 후 그것을 조카에게 관장시켰다. 구례 지역은 전라좌도 농민군의 군수물자를 공급, 비축하는 역할을 다한 것이다. 한편, 구례 농민군의 군사활동도 눈에 띈다. 구례의 농민군은 1894년 음력 11월 남원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박봉양이 지키고 있던 운봉을 함락한 후 팔랑재를 넘어 경상남도 지역으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이는, 북상하는 농민군의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역할 뿐만 아니라 경상도 지역으로까지 전투의 외연을 확대하여 관군과 일본군의 군사력을 분산시키고 나아가 부산을 근거지로 하는 일본세력을 구축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미 전라좌도의 남쪽에서는 순천의 영호도회소가 음력 9월이후 섬진강을 건너 하동과 진주까지 진출하여 관군 및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들은 경상도 지역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저지할 거점을 벌써부터 확보하였던 셈이다. 따라서 남원과 구례의 농민군들도 하루속히 영남우도의 223) 위의 책, 2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