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age

동학혁명 73 하였으며, 순무영은 軍務衙門에 다시 소속되었다. 이로써 1895년 음력 1월경 곡성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은 일단락되었다. 이와 같이 옥과를 포함한 곡성은 농민군과 관군의 군자조달 요구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태인접의 접주를 포함한 농민군 약 90명이 화약 폭발사고로 목숨을 잃었으나 곡성에서 활동한 농민군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약 10명 정도의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음력 5월 이후 집강소 활동기에 들어서자, 구례 역시 농민군의 세상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구례 雲鳥樓의 주인인 柳濟陽조차 농민군을 피해 깊은 골짜기에 판잣집을 짓고 살 정도였다. 반면에 농민군들은 스스로 接長이나 砲士라고 부르면서 군수물자를 조달하러 다녔다. 특히, 농민군은 말과 철환, 총, 화약 등을 징발하였는데, 구례의 경우에는 주로 남원의 농민군들이 군수물자를 징발한 것 같다. 221) 한편, 집강소 활동기에 嚴世永은 廉察使로 파견되어 여러 고을을 순시하였으나, 농민군들은 그를 깔보고 야료를 부렸다. 222) 그가 구례에 도착하였을 때, 마침 고흥출신의 유복만이 지휘하는 농민군들도 구례를 지나는 중이었다. 그들은 엄세영에게 거짓으로 귀화한다고 하자, 엄세영은 너무나 기뻐서 구례현의 공금 1천량을 轉用하여 그들의 여비로 보태주기도 하였다. 그리고는 농민군이 모두 평정되었다는 문서를 발송하였으나, 농민군의 활동이 더욱 거세어졌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후 염찰사로 여러 군현을 순행하던 엄세영은 순천의 선암사에서 농상공부대신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서울로 올라가버렸다. 농민군은 각 군현을 단위로 진행되는 폐정개혁과 포교 및 군사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집강소나 도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상당수의 양반이나 향리들이 농민군의 활동에 호감을 표시하거나, 적극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다. 구례의 경우에도 그러한 사람이 있었다. 구례현감을 지낸 南宮杓와 趙圭夏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가운데 남궁표에 관하여 살펴 보자. 구례 현감을 지냈던 남궁표는 관직에서 물러나 구례에서 살고 있었는데, 앞장 서서 그 지방 적 임정 연을 따라 입도하여 ‘제자’라고 하면서, 현의 백성들에게 입도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동경대전』 을 펼쳐놓고 쉬지 않고 읽으며, 그 내용에 찬탄을 연발하였다. 이 때문에 어리석은 백성들 중 추종하 는 자가 날마다 늘어났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229쪽). 남궁표는 구례 접주 임정연을 따라 동학에 입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례 주민들에게 입도를 권유하여 많은 사람들을 교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특히, 그가 『동경대전』을 열심히 읽었다는 221) 위의 책, 23쪽. 222) 황현, 김종익 옮김, 『번역 오하기문』, 1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