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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없을 정도였다. 194) 특히, 용귀동은 용귀동접의 근거지로서 대부분 동학교인이거나 농민군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말미암아 쑥대밭이 되었다. 관군들이 농민군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농가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약탈과 보복을 일삼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용귀동의 수백호 가옥이 텅 비었으며, 이곳에서는 죄가 없어도 살 수가 없을 정도였다. 195) 약 10년전 용귀동의 이씨 집안에서는 李載烋가 농민군이 아닌데도 체포되자 부인이 쓴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혈서가 발견, 공개된 바 있다. 196) 이재휴의 부인 안씨가 쓴 혈서로서, 주된 내용은 동학에 가담한 적이 없는 남편 이씨가 억울하게 체포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으니 석방시켜달라는 것이었다. 197) 당시 창평현감은 혈서의 주인공인 안씨 부인을 불러다 조사한 끝에 남편을 방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용귀동의 경우 수성군의 행패가 극심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 죄인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수성군측의 별군관과 ‘의병장’들은 농민군 진압작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훗날 포상을 받았다. 198) 한편, 남응삼은 운봉전투에서 패한 후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았다. 그는 숨어 지내다가 1905년을 전후하여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이무렵 그는 일진회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199) 그가 1900년대 중반 일진회원으로서 전주의 여관에 머물고 있을 때 정석모가 찾아가 만났다고 한다. 한편, 남응삼의 서기였던 국기춘은 1895년 김홍집과 박영효와 연결되어 法部主事가 되었으나, 그들이 실각할 때 그 역시 구금되어 金甲島에서 10년동안 유배되어 있다가 풀려났다. 200) 담양의 동학교인 김중화는 체포되어 죽을 날을 기다리다 탈옥하여 목숨을 건졌다. 201) 그는 백산봉기에 가담한 장령급의 한 사람으로, 농민혁명기간동안 적극적인 활동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이 끝난지 수년이 지난 후에도 농민군에 대한 보복문제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것 같다. 『독립신문』 1898년 6월 28일자 잡보에 담양군 궐리 국홍묵이가 갑오년에 동학당 김형슌 에게 쥭 었는데 국가의 아들 국제봉 등이 저의 아비 원수를 갚으려 하더니 해도 어라라 하는 이승욱씨가 동학당 세명을 담양군에 잡아 가두는데 김형순이가 그 속에 들었는지라 국가 삼형제가 김형순을 악형하여 사사로 문초받아 천만 애매한 땅에 사는 정진사 인악씨를 그릇 죽인 고로 성옥이 되었는데 검관과 사관이 국가의 행패함으로 종실히 성안이 못된지라 해도 관찰부에서 장시 만민을 대하여 공개재판 후에 국가와 정씨들을 고등재판소로 194) 위의 책, 325 637쪽. 195) 위의 책, 670쪽. 196) 무등일보 1994년 6월8일자 「속 동학혁명일백년」. 197) 『담양·창평 한말의병사료집』, 589쪽. 198) 위의 책, 341쪽. 199) 「갑오약력」, 『동학란기록』 상, 75쪽. 200) 위와 같음. 201) 오지영, 위의 책, 5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