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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65 남응삼이 남원으로 가던 길에 순창을 통과하다가 순창군수 李成烈을 만나 논의할 일이 있었다. 173) 의논하는 과정에서 남응삼은 순창군수의 업신여기는 말투가 귀에 거슬려 급기야 말다툼을 벌였다. 화가 난 남응삼은 자신이 인솔하는 800여 명의 농민군을 순창의 각씨 연못가에 진을 치게 하고서 김개남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김개남이 허락을 하지 않은데다 순창 집강 李士文의 중재로 인해 겨우 진정하고서 군사를 거두어 남원으로 돌아갔다. 음력 10월 14일에 김개남이 전주를 거쳐 북상하자, 열흘 뒤인 24일에 남원은 朴鳳陽이 이끄는 약 2천명의 수성군에게 점령당하였다. 그러나 박봉양군이 철수하자마자, 농민군은 곧바로 남원성을 회복하였다. 유복만 남응삼 김홍기 김우칙 이춘종 김원석 등이 성을 되찾은 것이다. 이들은 남원의 각 面坊別로 군수물자를 할당하여 징발하였다. 174) 농민군은 미곡 짚신 담배 솜 가죽 대나무 삼베 등을 주로 거두어들여 창고에 저장하였으며, 부족한 물자는 상인들로부터 징발하여 군복과 깃발 등을 제작하였다. 이들은 이제야말로 운봉을 함락할 시기라고 판단하여 신중하게 계획을 세우고서 충분한 군수물자를 확보하여 운봉공격에 나섰다. 이에 앞서 남응삼의 농민군을 주축으로 장수를 점령하여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운봉을 지키고 있는 박봉양의 수성군을 위협하였다. 그리하여 음력 11월 13일 남응삼 등은 유복만의 부대와 합류하여 남원군 山東坊 釜洞村에 주둔하며 운봉을 공격할 채비를 갖추었다. 이를 눈치챈 觀音峙의 防守將 鄭斗會는 박봉양에게 즉각 그러한 사실을 알렸다. 박봉양은 14일 새벽 2시경, 2천여 명을 끌고 관음재를 넘어 산동방 부동촌 가까이 접근하여 농민군을 유인하였다. 부동촌에 주둔한 농민군 가운데 남응삼 부대와 남원 官奴 출신의 김원석 부대는 전후 2개 부대로 나누어 수성군을 공격하였다. 수성군이 거짓 패한 척하며 달아나자, 이들은 깃발을 앞세우고 나팔을 불며 거침없이 밀고 들어가다 수성군의 복병에 걸려 크게 패하였다. 약 네시간에 걸친 악전고투의 결과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접주급 지도자로는 李用右 朴仲來 高漢相 曺漢承 黃京文 등이 전사하였으며, 일반 농민군 병사들의 희생도 막대하였다. 예상치 못한 역습을 당한 농민군은 남원으로 물러나 대책을 세우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었다. 음력 11월 하순, 유복만과 김홍기 김원석 자칭 대장이라는 승려 등은 4천여 명의 농민군으로 재편하였다. 이 가운데 유복만은 1천여 명을 인솔하여 곡성으로 나아가 군수물자를 징발하고 있었으므로 당시 남원 읍내에는 약 3천 명의 농민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를 챈 박봉양은 농민군이 증강되기 전에 남원을 점령하기로 결정하고서 28일 남원읍성을 기습, 공격하였다. 박봉양의 수성군을 맞아 온힘을 기울여 싸웠으나 농민군은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남긴 채 남원읍성에서 물러나야 했다. 당시 남응삼 등 탈출에 성공한 몇몇 농민군 지도자는 뿔뿔이 흩어져 자신의 생명만이라도 건져야 하는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173) 황현, 『번역 오하기문』, 264-265쪽. 174) 이하는 「박봉양경력서」(『동학란기록』 하, 511-5쪽)를 중심으로 정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