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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자였다. 169) 남응삼이 남원을 출발하여 담양으로 입성하는 장면은 아래와 같다. 한 마을이 모두 비어있고 단지 촌로 2명이 나와 환영하였다. 나는(정석모 : 필자주) 남씨에게 “동도들 은 언제나 기율이 없어 도처에서 주민들에게 작폐를 저지른다. 그러므로 민심이 모두 떠나버렸다. 이 는 실로 매우 상서롭지 못한 것이다. 公은 그 점을 주의하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작폐를 금지하는 엄명을 내렸으며, 나와 남씨는 농민군의 소재처를 동행하며 단속하였다. 또한 촌로를 잘 설득하자, 그제서야 촌민들이 술을 들고 몰려나와 환영하였다. 다음날 아침 赤城을 출발하여 담양군에 도착하 였다. 全郡의 동도와 郡屬吏卒들이 모두 나와 환영하였는데, 威儀가 매우 성대하였다(정석모, 「甲午 略歷」, 『동학란기록』 상, 73쪽). 농민군의 작폐가 문제되어 민심이 이탈되는 과정과 담양군의 당시의 정황을 알려준다. 또한 남응삼은 농민군의 비행을 방지하고자 노력한 지도자라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담양에서 활동중인 모든 농민군과 吏屬들이 열렬하게 환영한 점으로 보더라도 그가 민폐를 크게 끼친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남응삼은 덕망이 있었으며 주민들을 괴롭히지 않아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는 “비록 식견은 없었으나 마음에 독을 품지 않아서 나의 말을 잘 들었고 큰 폐단을 일으키지 않았다.”라는 평을 받았다. 170) 그는 부사에게 모든 행정을 일임시켰고 추호도 간섭하지 않았으며 혹 죄를 지으면 杖刑을 부과하였다. 당시 농민군의 활동에 소요되는 경비는 관에서 거둬들인 세금을 사용한 듯하다. 농민군이 소모한 경비가 상당하였는데, 1893년분 세금 5,850량과 大同錢 7,800량, 舊稅 9,830량 등 총 23,480량이나 되었다. 171) 아마도 담양의 농민군을 지휘한 남응삼이 김개남의 전량관인 점과 담양의 농민군이 그만큼 규모가 방대한데다 가능한 주민들로부터 군수물자를 강제로 징발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전봉준과 김개남을 중심으로 한 농민군들이 본격적으로 2차 봉기를 준비하자, 담양의 농민군들도 분주해졌다. 남응삼의 담양농민군들은 음력 10월 14일 남원을 출발한 김개남의 농민군을 대신하여 남원을 지켜야 했다. 남응삼은 김개남의 개선을 기대하며 농민군을 데리고 남원으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그의 서기였던 국기춘은 병을 칭하고 가지 않았으며, 정석모 역시 가정의 우환을 내세워 남원으로 가는 길에 귀가하였다. 국기춘과 정석모 등은 김개남의 패배를 예견하고서 남응삼을 차츰 멀리하며 농민군으로부터 이탈한 것이다. 172) 169) 「갑오약력」, 『동학란기록』 상, 73쪽. 170) 「갑오약력」, 위의 책, 74쪽. 171) 『각사등록』 54(국사편찬위원회, 1991), 716쪽. 172) 위의 책, 75-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