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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63 확대되자, 그는 가산과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거짓 투항하여 남응삼의 서기가 된 것이다. 아마도 남응삼은 국기춘의 실무능력을 이용하기 위하여 그를 서기로 삼았으리라 생각된다. 김개남이 남원을 점령한 이후 남응삼은 대체로 그곳에서 생활한 듯하다. 그는 7월 15일과 8월 25일에 열린 남원의 농민대회의 경비를 조달하였을 것이다. 그가 1894년 음력 11월 운봉을 공격하기에 앞서 장수를 점령한 것 역시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음력 9월 하순, 정석모는 담양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국기춘과 짜고서 김개남에게 五營制를 건의하였다. 166) 즉, 남원을 전라좌도의 본영으로 삼아 5개의 군영(軍營)으로 나누어 관장하는 방안이었다. 당시 김개남은 남원에 웅거하여 전라좌도를 통할하고 있었으나, 좌도에 속한 각 군현은 그의 지시를 잘 이행하지 않은데다 백성들을 괴롭히는 농민군조차 생겨나 그 허물이 상부로 돌려지곤 하였다. 이에 주요 지역에 5개의 군영을 설치하여 규모가 큰 包의 접주로 하여금 담당 군현을 관할케 하자는 방안이었다. 각 영이 관할하는 구역에서 만약 사건이 발생하면 즉시 서로 후원하게 하고, 일이 없으면 자신의 관할 구역을 관리함으로써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제도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남원에서 활동하던 대부분의 농민군 지도자들이 5영제를 지지하였으므로 김개남 역시 승인하였다. 이 제도를 입안한 정석모와 국기춘은 김개남의 지시에 의해 밤을 새워 節目, 즉 구체적인 시행방안을 만들었다. 이튿날 아침 절목을 승인받아 곧바로 시행하였는데, 五營印을 새기고 수를 놓은 五領旗도 만들었다. 또한 주요 지역에 五領을 두었는데, 담양은 前領이 되었고, 남응삼이 그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中領은 남원이었을 것이나, 나머지 좌·우·후령을 어느 지역에 정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능주, 순천, 임실, 진안 등이 해당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런데 5영제는 당시 전라도의 군사편제가 5진영으로 되어 있던 점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 전라도는 지방군인 束伍軍을 5개의 鎭營으로 관할하였는데, 5진영은 순천(前) 운봉(左) 전주(中) 나주(右) 여산(後) 등이었다. 167) 이러한 제도를 원용하여 좌도의 농민군을 5영으로 편제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5영의 책임자는 3일 안에 귀임하여야 하며, 5일에 1회씩 남원에 가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각 영에는 一元將 二元將 軍需將 營將 등을 두었으며, 수십 명의 省察과 統察을 두었다. 168) 그리하여 음력 9월 하순 남응삼을 비롯한 국기춘 등은 담양으로 돌아왔다. 남응삼을 호위하거나 보좌하던 성찰과 동몽, 그리고 담양의 농민군들도 함께 돌아왔음은 물론이다. 김개남에 의해 억류되어 있던 정석모도 담양으로 이송되었는데, 그는 남응삼의 부하에 의해 公事長으로 불리웠다. 공사장이란 접주의 다음 지위에 해당하는데, 모든 공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일을 맡아 처리하는 166) 「갑오약력」, 72-76쪽을 주로 참고하여 정리함. 167) 『大典會通』 권 4(고려대출판부, 1960, 397쪽), 兵典 外官職 참조. 168) 남원군종리원 편, 「宗理院史 附東學史」(필사본, 1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