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page

6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한달문의 행적은 확인할 수 없지만 현재 화순군 도암면 동산마을에서는 동학군 한 대장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감옥에서 업고 나온 한치화가 한달문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장독 후유증으로 얼마 못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하는 것이다. 당시 나중에서는 농민군에 대한 고문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을미년 정월 초사흘 나주에 도착했다. 함께 끌려간 30여 명이 죄인과 같이 문루 앞에 줄을 맞추어 서 있었다. 부안군에서 올라온 수성군 50여 명과 다른 사람들 50여 명이 와서 혁대와 나무 몽둥이로 때 리기를 두 차례나 하였다. 그리고 채찍으로 세 차례씩 때렸는데, 그 참상은 도저히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것이어서 입에 담을 수조차 없다(「金洛哲歷史」, 『전남동학농민혁명사』, 296쪽에서 재인용). 위에서 보이듯이, 체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여러 차례 매질을 당하다가 순간에 죽음에 직면하였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나주는 적어도 여섯 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으로 인해 수많은 농민군들이 목숨을 잃었다. 최소한 수백명 이상이 전투중에 전사하였을 것이며, 체포후 압송된 농민군 지도자와 병사층 역시 수백명이 처형되었을 것이다. 기적처럼 풀려난 농민군들도 고문이나 장독의 후유증으로 천수를 다하지 못하였으리라 믿어진다. 특히 나주는 초토영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전라남도에서 체포된 농민군들은 대부분 나주로 압송되었다가 활동 정도에 따라 각각 처벌을 받았다. 따라서 전라남도에서는 나주가 농민군의 희생의 대표적인 지역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나주의 인접지역인 화순의 농민군 활동은 어떠하였을까. 집강소 시기의 활동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아마도 화순은 전라남도에서 나주성 공격의 배후 기지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154) 대체로 화순의 농민군은 나주성 공격과 장흥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후 농민군이 패퇴하면서 화순은 주로 은신처로 이용되었다. 화순에는 모후산과 백아산 무등산이 연결되어 있어서 산간벽촌에 숨어들기 편하면서도 타 지역과 연락하기도 편리하였기 때문이다. 광주-나주의 농민군을 이끌었던 최경선은 梁海一과 함께 동복에서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인계되었다. 155) 그는 동복면 1894년 음력 12월 4일 벽송 마을에서 체포되었는데, 당시 220명의 농민군 가운데 157명은 전사하였고 63명은 포로로 붙잡혔다. 체포된 농민군 중 다수사 매질과 모진 고문으로 죽은 사실은 이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게 다루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일본군과 관군은 1894년 겨울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화순 이십곡리 입구에서 수많은 농민군을 집단 학살하였다. 156) 화순의 농민군들은 수성군과 관군에 의해 체포되어 현장에서 처형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가운데 비중이 높은 인물로는 광주에서 체포된 화순대접주 이규석, 화순 출신으로 장흥 대덕에서 주로 154) 『화순 충의록』(화순전통문화진흥회 조선대학교 한국학자료센터, 심미안, 2014), 190-191쪽. 155)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13쪽. 156) 『화순 충의록』, 1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