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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참상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 음력 12월 2일에도 ‘거괴’로 지칭된 全秀吉의 체포되어 우진영으로 압송, 효수당했고 농민군 3명도 砲殺되었다. 145) 광주 경양역의 동학농민군 金成甫는 음력 정월 20일 체포되어 압송중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146) 농민군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관군의 행패가 극심하여 마을이 텅텅 빌 정도였다. 한편, 광주의 접주 白般石 李汝日 金贊叔 李先圭 沈必仲 朴允植은 무기와 물자 징발로, 申在錫과 金成春은 농민군과 무기의 징발로, 崔西仲은 손화중의 起包將으로서 여러 군읍을 수행하고 무기의 징발로, 최경선의 馬夫인 무장 출신의 金有卜과 최서중의 마부인 고창 출신의 禹福彔 은 민간의 침탈로, 백반석의 당질인 영남 출신의 金民成은 가장 행패가 심한 자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음력 12월 28일 죽임을 당했다. 이와 함께 嚴召史는 동학의 通靈으로 일컬어졌는데 자수했으나 그녀 역시 희생되었다. 147) 농민군 진압을 독려하던 광주목사는 다음과 같은 榜文을 게시하여 거듭 해산을 촉구하였다. 아 슬프다. 匪類들이여. 모두 내 말을 잘 들어라. 너희들의 學은 무슨 학이며, 너희들의 道는 어떠한 도이기에 이름있는 선비와 문벌있는 사람들을 강제로 入道시키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협박하여 무리 에 속하도록 하는가. 남의 재물을 빼앗고, 남의 묘를 파고, 남의 집을 불태우고, 남의 부녀자를 겁탈 하고, 남의 자제를 죽인단 말인가. 그리고 끝내 軍器를 도둑질하거나 탈취하고, 심지어는 수령을 죽 이거나 해치는 일까지 저질렀으니, 이러한 일은 진실로 學의 큰 변고이며 道의 큰 도둑이라 하지 않 을 수 없다. 너희들의 부모들이 혹은 처자들이 문에서 기다리거나 혹은 마을 입구까지 나와 눈물을 흘리며 너희들의 歸化를 바라고 있다. 너희들이 진정으로 사람의 정이 있다면 지난날을 후회는 마음 이 없을 수 없을 것이다. 모두들 이러한 나의 말을 잘 듣고 빨리 귀화하기 바란다(「선봉진일기」, 『전 남동학농민혁명사』, 253쪽에서 재인용). 대체로 각 군현에서 내건 방문도 이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이로써 보면 집강소 시기이후 농민군 지도부가 추진했던 폐정개혁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신분을 가리지 않고 동학을 포교하고, 탐관오리의 징치뿐만 아니라 무기와 물자의 조달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농민군들이 민폐를 끼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 148) 이와 같이 광주에서 활동했던 농민군중 약 30명이 죽임을 당하거나 처벌받은 것으로 확인된다. 접주급 농민군 지도자는 대부분 죽임을 당하거나 효수되었으며, 가족들을 구금하는 등 가혹한 처벌이 자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군수물자와 농민군 징발, 특히 나주성 공략에 앞장섰으나 145) 「전라도소착 소획동도성책」, 『동학란기록』 하, 707쪽. 146) 위의 책, 712쪽. 147) 「순무선봉진등록」, 위의 책 상, 672-673쪽. 148) 오지영, 『동학사』, 503-5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