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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55 고초를 겪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2. 전남 중부지역 농민군의 활동과 피해 현황 1894년 6월 광주에도 집강소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집강소 시기의 광주지역 농민군의 활동을 알려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탐관오리를 징치하는 한편, 농민들을 괴롭혔던 양반이나 토호를 벌주거나 동학을 포교하였을 것이다. 또한 농민군 활동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고 무기를 징발하였다. 때로는 양반과 노비가 함께 동학에 입교하여 서로 “接長”이라 호칭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염원하며 폐정개혁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던 중 제2차 봉기의 동원령이 내려지자 광주에서는 박성동이 4천명의 농민군을 불러 모았다. 당시 광주의 농민군 지도자인 廉世煥은 농민군 일부를 이끌고 논산에 올라가 북상하는 농민군에 합류하였다. 141) 하지만 광주의 주력 농민군들은 孫化中과 崔卿宣의 지휘를 받아 나주성 공격과 후방경계에 참여한 것으로 짐작된다. 손화중은 정읍출신으로 전봉준 김개남과 더불어 3대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고창 禪雲寺 도솔암의 마애불상에서 비결을 꺼낸 주인공으로 유명하며, 최경선은 본명이 永昌으로 태인출신인데 5대 지도자로 일컬어졌다. 142) 이들은 전봉준의 ‘股肱’, 즉 최측근 인물로 활동했는데 어떻게 광주를 근거지로 삼게 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아마도 이들은 일본군의 후방침투를 경계하여 남쪽의 나주성 공략을 담당하는 역할을 분담한 것으로 짐작된다. 즉 전봉준은 전체 농민군은 통괄하고, 김개남은 동쪽의 남원, 金德明은 농민군의 주 근거지인 북쪽의 정읍, 손화중은 서쪽의 고창, 최경선은 남쪽의 광주 등을 맡았던 것 같다. 하지만 광주의 남서쪽에 있는 나주가 요지부동인 상황인지라 손화중포까지 동원하여 나주공략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음력 10-11월 사이에 나주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나주성 공략에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음력 11월 27일 농민군 수만명을 이끌고 광주로 회군해서 관아와 민가를 일시 점거했다가 다음달 초하룻날 농민군을 해산한 후 종적을 감추었다. 이 과정에서 광주의 대표적인 접주 朱允哲 朴允化는 음력 12월 3일 체포되어 杖殺당했고, 鄭水海 李奉(秉)祚 許仁(五)는 다음날 체포되어 砲殺되었다. 당시 광주읍 접주 朴士執과 나주접주 全由(有)昌도 체포되어 나주의 초토영으로 압송되었으며, 화순의 대접주 李圭石은 처음에는 몸을 피했으나 6일 체포되어 포살되었고, 농민군 金判權 鞠永信 金占用도 그 다음날 체포되어 우진영으로 압송되어 활동의 경중을 따지게 하였다. 143) 당시 전유창의 부인 이조이와 박사집의 아들 朴文局은 남편과 아버지가 나타날 때까지 구금되었는데, 144) 이 점만 보더라도 당시 농민군 가족들이 겪었던 141) 「天道敎會史草稿」, 『東學思想資料集』 壹, 462쪽. 142) 「崔永昌 孫化中 判決宣告書」, 『동학관련판결문집』(정부기록보존소, 1994), 31-32쪽 ; 최현식, 앞의 책, 245-248 253-254쪽 ;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김영사, 2008), 66-72 104-110쪽. 143) 「순무선봉진등록」, 위의 책, 572쪽 ; 「전라도소착 소획동도성책」, 『동학란기록』 하, 707쪽. 144) 위와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