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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밀고로 죽임을 당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이 참고된다. 고창군수를 지냈던 李鎭九는 원래 함평 아전이었다. 난이 일어난 초기에 함평 아전 李象三(李相三- 저자주)이 적과 내통하였는데, 적이 평정되자 민병에 가담하여 스스로 守城將이라 하였다. 진구는 閔 種烈을 사주하여 상삼을 불러오도록 하여 죽여 버렸다. 이도재는 진구를 소모관에 임명하였고, 진구 가 소모관이 되어 함평에 이르렀을 때 상삼의 다섯 아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그를 죽여 버렸다. 진구 는 여러 읍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묵은 감정만을 갚았고, 영광에 들어가서는 20명을 죽이는 등 그에게 횡액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그가 죽자 많은 사람들이 다행으로 여겼다(황현, 『국역 오하기문』, 137쪽). 위의 인용문에 의하면 이상삼과 이진구는 함평의 향리였다. 이들은 향리로 성장하여 전자는 무과를 거쳐 군산첨사를, 후자는 고창군수를 역임할 정도로 입신양명한 인물들이었다. 그후 동학농민혁명의 시기에 전자는 농민군을 후원하였으나 후자는 농민군의 반대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농민군의 형세가 날로 불리해지자 이상삼은 반농민군으로 돌아서자 이러한 사실을 이진구가 나주목사로서 호남초토사였던 민종렬에게 밀고했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이상삼, 즉 이태형은 죽임을 당했고 이를 억울하게 생각한 그의 아들들이 이진구를 사사로이 죽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진구가 소모관을 빙자한 횡포가 워낙 심해서 주민들은 그의 죽음을 반겼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방 세력간의 내부적 갈등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음력 12월 5일 이화진을 비롯하여 접주 金京五 李春益 李在(滋)冕 李坤辰 金成必 金仁五 金成西 魯德輝 등 9명이 포살되었고, 다음날에도 접주 金治五 鄭元五 鄭坤西 金京先 尹景郁 등 5명이 같은 방법으로 죽었으며, 이화진의 수행원 조병묵 등 6명도 이화진과 같은 날 체포당했다. 117) 같은 달 7일에는 접주 李斗連 金學必 李觀燮 李昌奎 孔明五 등이 붙잡혀 포살되었고, 다음날 접주 李在卜 金元叔도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다. 118) 9일에도 ‘巨魁’ 尹正甫 張京三, 대접주 朴春西 鄭平五 金時煥 尹贊辰 金京文 朴京仲 등 8명이 붙잡혀 포살되었다. 119) 그중 鄭平五(1847-1894)는 海保面 知谷 출신이었는데, 수성군에 의해 희생되었다. 120) 한편, 이화진의 수행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된 6명중 5명은 함평출신이었다. 121) 曺丙默과 李應模는 손불면 加德山 출신으로, 같은 마을 김학필로부터 동학을 전수받았으며, 김학필은 이화진접의 일원이었다. 영광출신의 수행원 서우순은 손불면 장동 출신의 이화진과 이종간이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金文祚는 조병묵과 동향으로, 김학필의 조카로서 김학필로부터 동학을 전수하였다. 117)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583쪽. 118) 위의 책, 586쪽. 119) 위의 책, 592쪽. 120) 최현식, 앞의 책, 271쪽. 121)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27-6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