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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45 순천 府民 수천명이 수령의 불법적 수탈에 항의하자, 순천부사 김갑규가 겨우 무마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1862년 농민항쟁 당시에도 순천에서는 수천명의 농민들이 수령과 이서배들의 탐학에 저항했으며, 30여 년이 지난 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재연되었다. 불법적 수탈의 고질적인 병폐가 전혀 고쳐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전봉준이 무장에서 기포하며, ‘조선 팔도는 魚肉이 되고 만백성은 도탄에 빠졌는데도 지방 수령들의 탐학은 더욱 가혹’해서 견디기 어려우니 백산에 집결하여 보국안민하자고 호소하자, 순천에서도 朴洛陽이 농민군을 모아 백산으로 달려갔다. 87) 고흥에서도 柳希道 具起瑞 宋年浩 등이 농민군을 이끌고 가담하였다. 88) 이처럼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따라 전라병사 李文榮은 전남 각지에서 포군을 징발하였다. 즉, 강진 해남 영암 장흥 보성에서 각 50명을 징발하여 그중 200명을 나주로 보내고 나머자는 본영에 주둔시켰다. 또한 순천에서 150명, 광양 낙안 곡성 흥양에서 각 100명, 구례 창평 동복에서도 각 50명씩 砲軍을 징발하여 그중 200명을 무안으로 파견하였으며, 나머지 병력은 본영에 주둔시켜 농민군에 대비하였다. 89) 이상과 같이 광주-전남의 동학 수용은 1890년대 초반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알아보았다. 전남의 동서부를 막론하고 1890년대 초에 동학을 수용하였으며 중부 일부 군현에서는 1893년 전후하여 입교하였다. 이들중 상당수는 1893년 음력 3월에 열린 보은취회에 적극 참여하여 교조신원운동과 ‘斥倭洋’을 외쳤다. 보은취회와 같은 교조신원운동이 제1차 동학농민혁명의 도화선으로 작용한 셈이다. 당시 보은취회에는 수만명, 최소한 2만명의 동학농민들이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광주-전남의 동학교인이 보은취회에 참여한 규모는 영암접 40여 명, 나주접 70여 명, 무안접 80여 명, 순천접 50여 명, 함평과 무안에서 각 수십명 등으로 확인되며, 그 밖에도 진도 광양 등의 동학교인들도 참여하였다. 즉, 광주-전남 지역에서는 약 8개 군현의 동학교인이 참가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보은취회에는 참가자만 약 12,400명으로 확인되는데, 그중 절반이 넘는 6,200여 명이 전라도 동학교인들이었다. 90) 이 점만 보더라도 조선왕조의 폭정에 가장 심한 핍박과 탄압을 받은 전라도의 동학농민들이 보은취회에 가담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적극 표명했던 것이다. 물론 광주- 전남의 동학교인 중에는 1892년 후반부터 추진된 공주와 삼례, 원평의 취회에도 가담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현재는 고흥의 동학교인 수십명이 원평취회에 참여한 후 보은취회에도 가담한 사실이 주목된다. 한편, 무장기포이후 백산대회에는 광주-전남 17개 군현의 동학농민군 지도자 약 60명이 농민군을 이끌고 가담하였다. 보은취회에 광주-전남의 8개 군현이 참여한 것과 비교하면 2배로 증가한 87) 오지영, 『동학사』, 459쪽. 88) 위와 같음. 89) 황현, 김종익 옮김, 『번역 오하기문』, 85쪽. 90) 田保橋潔, 『近代日鮮關係の硏究』 上(中樞院, 1940), 125쪽.